김진영 다큐멘터리스트
김진영 다큐멘터리스트

이야기를 듣고, 쓰고, 찍는 다큐멘터리스트. 좋은 질문을 던져, 세상에 흩어져 있는 이야기를 엮어내고 전달하는 일이 좋아 다큐멘터리 PD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를 온몸으로 겪으며 콘텐츠 기획자로, 때로는 브랜드 콘텐츠 전략가로 하는 일이 확장됐다. 다큐에세이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다’를 썼다. 본교 영어교육학과를 2012년에 졸업했다.

 

얼마 전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비포 선라이즈’를 봤다. 1996년에 개봉한, 100분 내내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비엔나를 배경으로 단 한 순간도 말을 멈추지 않는 바로 그 영화가 맞다. 거의 20년 만에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내가 얼마나 ‘비포 시리즈’를 좋아했는지, 또 얼마나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을 좋아했는지 그 열렬한 감각이 밀려왔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또 다른 영화 ‘보이후드’는 내가 정말로 사랑하는 ECC의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봤다. 퇴근 후 부리나케 뛰어와 텅 빈 영화관에서 무려 3시간 가까이 잔잔한, 다큐인지 극영화인지 헷갈리며 봤던 기억이 선명하다.) 마침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것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생각할 수 있었던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그 여행의 마무리로 더할 나위가 없었다.

지난 2, 3년간 나는 나를 둘러싼 환경에 무척 많이 흔들렸다. 살다 보면 누구나 흔들릴 수 있다. 그렇지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세찬 바람에 멀미가 심했고, 심지어 몸과 마음이 많이 아팠다. 이렇게 내게 불어오는 ‘바람’을 나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하여, 바람을 ‘피해’ 트랙에서 내려오는 방법을, 서울을 떠나는 방법을 택했다.

일을 모두 그만두고 서울을 떠나니 자연스레 바람도 줄었다. 그동안 입었던 내상을 복구할 수 있는 시간을, 나를 돌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 어느 때보다 나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고 ‘진짜 나’, ‘진짜 나의 삶’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건강하게 나를 회복시키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일들로 내 시간과 생각을 채웠다. 반짝거리는 인사이트가 가득하지는 않지만, 찬찬히 내면을 살필 수 있는 것들을 가까이했다. 일과 삶의 중심을 되찾기 위해 결국 내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자극이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했던 감각의 환기였다.

지금 나를 만든, 나의 기반이 된 것들을 다시 들춰봤다. 사회 초년생 시절의 기록들, 혹은 더 이전의, 너무도 이루고 싶은 꿈을 향해 돌진하던 시절의 기록들. 순수하고 열정적이며 오직 내 생각과 가치관과 목표로 똘똘 뭉쳐 있던, 어떻게 보면 조금은 무모했던 시절의 나를 다시 소환해냈다. 그때 나는 무엇을 읽고, 무엇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글을 썼는지 돌아보면서 나의 중심을 다시금 회복해 나갔다.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살리는 것은 타인의 무언가가 아니라 내가 살아온, 내가 쌓아온 무언가들의 힘이다.

이제는 오롯한 순수와 열정에 세월이라는 더께가 쌓여 나의 일과 삶이 더는 이벤트가 아닌 매일의 일상이 되었지만, 어떤 스위치가 반짝하고 켜지면 내가 하는 일이, 내가 사는 지금 이 순간이 새삼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처음 출근하던 날의 공기, 맨 처음 내가 이 일을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꼈던 순간의 기억, 이 일을 평생 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느꼈던 날의 기분을 상기시켜주는 그런 스위치들. 마음이 건강할 때 나만 아는 나의 스위치를 많이 만들어두는 것이 좋다. 타인의 절절한 초심을 읽으며 내 초심을 되새기기도 하고, 소년만화나 성장만화를 보며 일과 삶에 대한 순수함에 다시 감동하곤 한다. 번아웃을 극복하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데에 큰 도움을 받은 두 권의 책을 소개하고 싶다.

첫 번째 책은 ‘데뷔의 순간’이라는, 봉준호, 양익준, 박찬욱, 류승완, 변영주 등 영화감독 17인의 데뷔를 위한 분투기이다. 2014년 출간된 이후 매년 한 번씩은 꼭 읽는 책이다. 읽을 때마다 같은 대목에서 여전히 가슴이 벌렁거린다. 예전엔 무슨 말인지 몰랐던 문장에 머리를 맞기도 한다. 책이 출간됐던 때보다 더 대단해진 사람도 있고, 여전히 묵묵히 자기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둘 다 그것대로 좋다. 시간이 기록의 가치를 더해준 것 같아 더욱 감동하게 된다. 불확실성 속에서도 자신을 믿고 다시 일어서서 걸어가는 데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지, 계속 그 길을 걷는 것 자체가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솔직하고 처절하게 기록돼 있다. 혹독한 분투의 끝이 찬란하든 찬란하지 않든, 분투의 과정만이 내뿜는 아름다움을 환기해줌과 동시에, 각자의 길을 걷는 힘을 나눠준다. 정말로, 어떤 분투는 영원히 빛이 난다.

두 번째 책은 ‘그리고, 또 그리고’라는 총 5권으로 된 만화책인데, 미대에서 정통 회화를 공부하다 만화가가 된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이다. ‘어떤 순간에도 그리는 사람은 그저 그리는 수밖에 없다고, 그리고 싶은 주제가 없어도 상관이 없으니 그리는 사람은 그저 그리고 또 그리라’는 삶의 기본기를 가르쳐준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으로 가득하다. 개그 만화로 유명한 히가시무라 아키코의 작품이라 웃으면서 울게 된다. 번아웃의 긴 터널을 지나는 내내 여러 모양의 위로로 나를 붙들어준 친구의 추천으로 처음 보게 되었는데, 펑펑 울며 커다란 위로를 얻었다. 앞으로도 언제고, 내가 마음속 깊이 사랑하는 일과 내가 지금 잘하는 일, 혹은 당장 할 수 있는 일 사이에서 번민할 때마다 찾을 것이다.

이 두 권은 내게 효과적인 스위치들이자 치트키이다. 나의 ‘처음의 마음’과 닿아있는 내용들이기 때문에 초심을 회복하고 싶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모두 저마다의 처음의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을 함께 했던 책이나 콘텐츠가, 언어와 이야기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걸 놓치지 않고 잘 잡아두길 바란다. 언젠가 분명 나를 일으켜 세우고 살릴 테니.

김진영 다큐멘터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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