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편의점 식품 코너에 놓여있는 식물성 랩. 팔라펠과 후무스가 들어있는 채식주의자 맞춤 상품이지만 다른 고기 함유 상품과 비슷한 가격대다. 이수영 선임기자
영국 편의점 식품 코너에 놓여있는 식물성 랩. 팔라펠과 후무스가 들어있는 채식주의자 맞춤 상품이지만 다른 고기 함유 상품과 비슷한 가격대다. 이수영 선임기자

영국 마트에서는 어디서든 비건 음식을 찾아볼 수 있다. ‘새우 없는 새우튀김’ 같은 대체육부터 팔라펠을 비롯한 식물성 음식까지. 올해 초, 프랑스에서 교환학생을 했던 한 친구는 내게 유럽이 채식 지향의 삶을 위해서 너무나도 좋은 공간이라 말했다. 영국 또한 마찬가지다. 이 나라는 학교 식당에서마저 채식 메뉴를 제공할 정도로 다양한 삶의 방식에 민감하다. 하지만 이들은 분리수거를 하지 않는다.

잠깐, 분리수거를 하지 않는다고? 재활용을 아예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것을 먼저 언급하자면 이들은 음식물 쓰레기를 따로 버리지 않는다. 종이, 캔, 유리(mixed glass), 플라스틱병(bottle) 그리고 일반 쓰레기라는 분류 기준으로 쓰레기를 나눠버려야 한다. 하지만 이마저도 자율에 맡기는 상황이라 학교를 돌아다니다 보면 모든 것이 일반쓰레기에 모여있는 경우가 많다. 상황이 이러니 유색과 투명페트병을 분리하고, 페트병을 감싼 라벨을 떼어 플라스틱병과 나눠버리던 한국인들이 당황하는 것은 당연하다. 단순히 분리수거 체계가 엄격하지 않을 뿐만이 아니다. 일회용품 사용 빈도도 높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 학생들을 보면, 식당 내에서 먹는데도 불구하고 포장 용기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케첩과 브라운소스, 마요네즈도 공용 통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일회용 소스 파우치가 1,000개 담긴 바구니를 비치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음식물 쓰레기와 뒤섞여 같은 통에 처박히게 된다.

냉정하게 말하면 채식과 분리수거가 같은 선상에 놓인 문제는 아니다. 하나는 식생활이고 하나는 쓰레기를 처리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온 나는, 채식이란 모름지기 동물권 및 환경을 향한 의식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믿어왔다. 그렇기에 어떻게 채식에는 이렇게도 포용적이면서 분리수거에는 무심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곳에서 사람들이 채식주의자를 대하는 태도는 다르다. 그들이 바라보는 채식은 삶의 방식 중 하나에 불과할 뿐, 새로운 인권 운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들이 언제나 거창한 의식적 행위로서 채식을 시도하는 것은 아니다. 알레르기와 같은 생물학적 이유도 있고 단순히 맛이 없어서도 시작한다. 고통받는 동물의 해방을 위해 탈 육식을 선언하는 비건(vegan)도 존재할 수 있지만, 내가 오이를 먹지 않듯 붉은 고기에서 나는 냄새가 싫어 페스코 베지테리언의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 수많은 채식주의자는 자신만의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영국인들은 이를 존중한다. 하나의 운동이 아닌 존중해야 하는 그 사람의 선호로 채식을 받아들인다. 다채로운 문화적 배경에서 온 사람들로 인해 다양한 먹거리와 금기를 바라보는 것이 익숙해서일까. 채식주의자를 까탈스럽다거나 유난 떠는 사람들로 바라보는 경우는 찾기 어렵다. 대신 그들이 삶을 살아갈 수 있게끔, 어느 식당이든 채식 선택지를 기본으로 제공하며 그들을 포함하고 고려한다. 반면, 채식이 일반적인 삶의 형태에 불과하기에 성역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스스럼없이 대체육은 역겨운 맛이 난다며 불평하는 외국인 친구를 숱하게 만나왔다. 채식주의자가 아닌 이 친구들은 채식에 대해 어떠한 감정도 갖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을 지지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대체육의 시도가 동물권의 입장에서 어떤 위치를 갖는지 고려하지 않은 채 진짜 고기와 달리 역겨운 맛을 내는 덩어리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인권을 비롯해 정치적 올바름에 해당하는 많은 영역에 대체로 비슷한 태도들을 만나왔다. 존중하지만 지지할 필요는 없다는 식의 태도. 채식이 환경보호나 동물을 향한 착취를 멈추기 위한 행동으로 읽히지 않으니 분리수거를 하지 않는다 해서 채식주의자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인제야 분리수거를 향한 영국인들의 미온적인 태도가 이해가 갔다. 마트에 채식 코너가 있다고 해서 모두가 지구를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온 마음을 다해 지지하든,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그치든. 유럽인들의 인권 의식이 유기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파편적인 지지에 지나지 못한다고 해도 여전히 한국에서는 채식 코너 하나 찾기 어렵다. 다만 저항이 아닌 행위로 일상화돼버린 수많은 시도를 보며, 이들이 대중화됨과 동시에 힘을 잃은 것은 아닐까 걱정되곤 한다. 선진국의 대륙이라 불리는 유럽에서 높은 기준을 가졌다고 말하는 자들 또한 계속되는 진보가 아닌 일상적인 존중에 머무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누가 옳은지 끊임없는 힘겨루기와 작용-반작용이 계속되는 격변기의 대한민국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지 의문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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