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혜정(교공·22년졸) 스포츠서울 기자

 2016년 사범대학 교육공학과에 입학, 2022년 졸업했다. 같은 해 스포츠서울 공채로 입사, 한국체육기자연맹 소속으로 프로야구, 프로농구 및 다양한 스포츠 현장을 취재하고 있다.

 

올여름 초입, 배우 박은빈을 만났다. 잠시 영화 담당을 맡았을 때 나간 영화 ‘마녀2’ 인터뷰 자리에서였다. 벌써 3달이 넘게 지났지만, 여전히 마음에 남는 말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너무나 당연하게 분신처럼 나와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게 숙제였다. 작품 속 인생은 그 작품에서 기승전결로 완결을 맺지만, 실제 나는 계속 나아가고 있는 존재로서 이 삶이 완결될 때까지 지금 어느 시기를 지나고 있으며, 나는 어떤 사람인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배우 박은빈, 영화 ‘마녀2’ 인터뷰 중 자신의 대학 생활을 언급하며)

그날, 다시 책을 펼쳤다.

공감됐다. 과제에 치여 밤을 새우고, 아르바이트에 늦지 않기 위해 수업이 끝나자마자 정신없이 달려가면 한 학기가, 일 년이 지나있었다. 허무할 정도로 순식간에 사라진 대학 새내기 시절을 보내고 나니 이렇게 남은 3년을 보내면 졸업이겠거니 했다.

다짐했다. 2학년으로 올라가는 겨울방학, 더도 말고 ‘내 나이만큼만’ 책을 읽자고. 그날 눈보라를 뚫고 중앙도서관에 올라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빌렸다. 내 존재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것 같아서.

책을 읽기 위해 따로 시간을 빼지는 못했다. 편도 1시간 통학길마다 읽다 보니 평균적으로 2주에 1권씩 완독할 수 있었다. 이 속도면 한 달에 2권, 일 년에 24권이 가능했다. 얇은 책은 3일이 걸리기도, 두꺼운 책은 한 달이 걸리기도 했으니 한 해가 끝나갈 무렵이면 22~26권 정도 완독이 가능했다.

통학길은 꽤 피곤했다. 그렇지만 이 시간만큼은 핸드폰을 끄고 책을 읽는 나 자신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래도 가끔은 한강을 지나가는 옥수역 경치를 구경하곤 했다. 옥수역에서는 지하철 3호선이 유일하게 지상을 통과한다.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밝은 지상으로 올라올 때, 그때 마음에 닿는 문장을 만나면 이게 행복이지 했다.

22세부터 시작한 ‘내 나이만큼’ 책 읽기를 재학 기간 하다 보니 22+23+24+25+26=120권이 됐다. 그동안 버지니아 울프를 통해 사랑을 배웠다. 결국 남는 건 내 삶을 향한 나 자신의 진실한 사랑이다. 기존의 정보가 새로운 정보와 유기적으로 연결돼 새로운 확장으로 이어지는 희열을 리처드 도킨스와 마이클 샌델이 알게 해줬다.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에 대해서도 가르쳐줬다.

보후밀 흐라발이 당신 같은 책 덕후가 되어야 한다고 다짐하게 해줬다. 그의 책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푹 빠져 읽은 나머지 내려야 할 정거장을 놓쳤다. 처음이었다. 나 같은 한심한 인간이 세상에 또 있구나 하는 위안을 아름다운 문체로 다독여준 헤르만 헤세, 그의 유약하고 예민하지만 따뜻한 시선을 언제나 사랑한다.

한 권씩 완독하는 숫자가 쌓이다 보니 삶에 자신감이 차츰 생겨났다. 다양한 삶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세계관이 확장됐다. 이와 동시에 내면 또한 깊어졌다. 무한한 행복을 느꼈다. 작은 용기가 자라났다. 무엇보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져 통학길이 재밌었다. 수업 가는 길이 설렜다.

독서를 통해 쌓은 높아진 자존감 하나로 전공과 생판 다른, 생각지도 못한 분야에 도전장을 냈다. 소설가이자 언론인이기도 한 조지 오웰과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용기를 줬다. 그들은 세상의 이면을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을 길러줬다.

다시 박은빈에 대해 말해본다. 최근 언론 보도를 통해 그가 다독가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대중이 그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27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을 다독이며 지켜온 올곧고 단단한 심지다. 개인적으로 그를 알지 못하나 독서를 통해 바쁜 와중에도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며 스스로 어느 시기를 보내고 있는지, 인간 박은빈은 어떤 사람인지 오랜 시간 성찰했으리라.

부끄러웠다. 명색이 글로 먹고사는 직업을 가졌는데 취업을 준비한다는 핑계로, 취업 후에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한동안 책을 멀리했다. 온종일 현장을 돌며 화젯거리와 사건을 쫓아다니고 나면 진이 빠진다. 한두 달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있다. 배우는 더욱 그럴 테다. 작품을 골라 배역을 분석하고 대본을 외우고 촬영을 하다 보면 1년이 지나간단다. 자칫 대중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 쓰거나 일에 매몰되다 보면 개인의 삶이 없어진다.

사건 사고들을 이 세상에 기록으로 남기고 있었지만 정작 내 삶을 내 마음속에 남기고 있지 못했다. 그렇게 첫 직장에 적응해가며 쉼 없이 보낸 6개월을 지나 보낼 무렵, 그를 만나 이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그날, 다시 책을 펼쳤다.

그래서 묻는다. 나는 그리고 당신은 지금 어느 시기를 지나고 있나요.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요.

황혜정(교공·22년졸) 스포츠서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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