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시간과 함께 흘러 아프지 않은 것들만 남는다. 시간은 그 조각을 휩쓸며 아름다운 것들만 남긴다. 더는 힘들지 말라는 누군가의 배려일까. 중간고사 한 문제에 정말 목숨을 걸었던 지독했던 학창 시절도 지금 돌아보면 풋풋한 추억이듯이, 그렇게 기억은 아름다운 부분만 남긴 채 흐른다. 우리는 이 남겨진 조각을 추억이라 부른다.하지만 어떤 조각들은 너무 깊게 박혀버려서 아무리 강한 시간이 지나가도 그 자리에 머문다. 아무런 의도도 없이 투명하게, 계속 그 자리에 머물며 남아있다. 그런 것들은 슬프게도 마음을 아리게 하는 것들이 대부분
드라마/스위트 투스: 사슴뿔을 가진 소년(2021)우리는 스스로의 삶에 생각보다 많은 제약을 걸며 살아간다. 이건 안 될 거야, 이건 너무 어려워, 나는 못 해... 자신의 발밑에 이러한 선을 긋고 그 안에 갇혀 나오지 못한 적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선은 훗날 자신에게 후회의 화살로 되돌아오곤 한다. 현재의 내가 쌓여 미래의 나를 만든다. 지금의 선택 하나하나가 앞으로의 내 삶의 여정에서의 방향을 조금씩 틀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조금의 틀어짐이 굉장히 큰 차이를 만들기도 한다.에는 전염병이 돌아 인류가 한차례
매해 3월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1908년 3월 미국 뉴욕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시간 단축, 임금 인상, 노동환경 개선, 여성의 참정권 쟁취를 위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여성들의 대규모 시위였다. 당시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은 먼지가 가득하고 쉴 곳도 없는 환경에서 하루 12시간 이상 일했지만, 임금은 남성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고 선거권도 갖지 못했다. 1910년 뉴욕의 의류공장에서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 수백 명이 화재 사고로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고, 당시 미국의 여성
편집자주|프랑스 릴 가톨릭대 교환학생으로 파견된 김현수(불문·21)씨가 '미드나잇 인 릴' 칼럼을 2023-1학기 제작기간 중 격주로 연재합니다. 릴 대학에서의 흥미로운 일상을 전합니다.‘선택하신 과목은 수강인원이 초과되었습니다.’ 이화여대, 아니 한국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들은 적어도 한 번씩은 봤을 문구이다. 대학에서는 매 학기 시작하기 전, 자신이 들을 과목을 정하여 수강신청을 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인터넷에 접속하여 각 학교의 포탈 서비스에 들어가서 과목별로 배정된 코드를 입력하여 일명 ‘장바구니’에 과목을 등록해놓은
본교 시청각교육과(교육공학과)를 1987년 졸업했다. 국회도서관에서 30년 넘게 일하며 서양서 구입, 홍보CS, 의회정보서비스총괄, 전자정보정책 등의 업무를 했고 현재 기록정책과장으로 있다. 미국 USC 동아시아도서관에서도 1년 반 정도 일했다. 이때 도서관과 영화 이야기를 엮어 국회도서관보에 ‘영화 속 도서관 이야기’를 몇 편 게재한 이후로 동명의 시리즈를 쓰고 싶다는 야망을 수년째 품고 있다.생각해보니 나의 책읽기는 외로움에서 시작된 것 같다. 만 10세, 초등학교 4학년. 언니 오빠들과 도시 유학을 떠나 군민에서 도청소재지 시
영화/애프터썬(2022) 속 소피와 캘럼이 방문했던 페르시안 카펫 상점, 상인은 말했다. “Each Of These Carpets Tell A Different Story(각각의 카펫은 저마다의 사연을 가졌어요)”.은 어른이 된 소피가 아버지 캘럼과 함께 튀르키예에서 보냈던 열한 살 여름 휴가의 기억을 관객에게 ‘엿보이는’ 영화다. 이십여 년 전의 추억이 담긴 캠코더를 조작하는 소피의 손동작은 마치 닫혀 있는 방문을 여는 듯 하다. 조심스레 문고리를 열어젖히듯 재생버튼을 누르는, 이제는 뼈들이 제법 단단하게 여
본교 경영학과를 2009년 졸업하고 삼성화재 해상보험팀으로 입사했다. 일반보험손익파트와 IFRS추진파트를 거쳐 현재 투자전략파트에서 인오가닉 전략수립 및 해외피투자사 관리, 글로벌 신흥시장 B2C 마켓 및 일반보험 시장 확대 전략 기획 등을 맡고 있다.요즘 유행하는 MBTI로는 ENFP(재기발랄한 활동가). 사람 만나길 좋아하고 항시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며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충동적 성향까진 갖춘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다는 보험회사에 다니게 될 줄 누가 알았던가. 별 사고 없이 무탈하게 지나가는 하루가 가장 큰 복인 보험회사
편집자주|노르웨이 오슬로대 교환학생으로 파견된 김해인 선임기자가 2023-1학기 '노르웨이에서 행복을 묻다' 칼럼을 제작기간 중 격주로 연재합니다. 노르웨이에서의 행복을 담은 일상의 순간을 전합니다.노르웨이라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연어, 순록, 겨울왕국, 그리고 비싼 물가. 노르웨이는 북유럽 중에서도 가장 비싼 물가를 자랑하는 나라다. 맥도날드 빅맥버거 약 12000원, 버블티 한 잔 약 9000원, 커피 한 잔 8000원, 맥주 한 잔 12000원, 담배 한 갑 15000원 정도이며, 패스트푸드점이 아닌 번듯한 식당에서 밥
방학 중 인상 깊게 읽었던 책 한 편에 관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한정현 작가의 장편소설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나를’)이다. ‘정상적’인 ‘남성’ 위주의 역사 속에서 여성, 성소수자, 혹은 둘 모두의 정체성을 가진 이들의 존재는 끊임없이 배제되어 왔다. 이렇게 편향적으로 쓰인 역사를 경계하는 소설 ‘나를’은 긴장감 있는 추리물의 형식을 빌려 배제된 이들이 겪어야 했던 억압과 대상화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고발한다.‘나를’의 구체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성형외과 의사인 ‘연정’과 문화 연구자 ‘설영’에게 낯선 단어들이
책/해가 지는 곳으로(2017)태어났으니 그저 살아갈 뿐인 나는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같은 존재론적 질문 앞에서 말문이 턱 막히곤 한다. 핑계는 고리타분하다. 경쟁과 자본주의적 욕망으로 점철된 대한민국에 사는 탓에 삶, 탄생과 죽음에 대해 깊이 고찰해 볼 시간이 없었다고. 마치 “일을 하지 않으면 금방 가난해”지므로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을 포기해야 했”던 ‘류’처럼 말이다. 찰나뿐인 철학적 사유는 명확하게 매듭지어지지 못하고 모호하게 끝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내가 조심스레 말하건대, 인간이 저마다의 불행을 끌어안고서
몇 주 전 다른 대학에서 진행한 교양교육 포럼에 참석했다. 교양교과의 방향, 의사소통 교육, 소프트웨어교육 등 포럼의 중요 주제를 듣던 중 공통적으로 등장한 화제가 있었다. 장안의 화제가 된 CHATGPT가 그 주인공이었다. 특정 키워드를 제공하면 AI가 참고자료를 추출, 검토하여 원하는 분량의 글을 쓰기도 하고 음악을 만들기도 했으며 프로그램 코드를 간결히 짜기도 했다. 관련 자료를 소개한 연사는 직접 CHATGPT를 사용한 결과를 보여 주었다. 특정 주제로 글쓰기를 지시하자 순식간에 그럴듯한 글이 나왔다. 허술한 부분이 많았어도
점점 따뜻함이 품 안으로 스며드는 계절이다. 10월의 끝자락에 디뮤지엄의 ‘어쨌든 사랑 : Romantic Days’ 전시를 친구와 같이 보러 갔다. 순정만화를 모티브로 가져온 작품들이 많았는데, 순정만화를 보고 자란 세대가 아니었기도 했고 에로스적인 사랑은 그다지 감흥이 없어서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오히려 시험 기간이 이제 막 끝나서 지친 상태임에도 얼굴을 보자고 달려온 친구와 함께한다는 사실이 내게 더 가까운 따뜻함이었다.내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해주고, 내가 아플 때 걱정해주고, 종종 잘 지내는지 연락하는 따뜻한 챙김이 나에겐
80일. 터무니없이 짧아 보이는 시간이지만 거의 한 학기에 다다르는 시간이다. 어느새 영국 땅을 밟은 지 80일이 됐다.지낼 수 있는 기간의 절반이 넘어간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이제는 귀국 날까지 남은 시간보다 이곳에서 보낸 날이 더 길어졌다. 크리스마스를 주축으로 긴 방학을 가지는 유럽은 12월 초가 지나면 학교에 간다는 느낌도 희미해진다. 그렇게 계산해보니 내게 남은 시간은 2주 남짓. 내 인생의 거창한 전환점이 되리라 예상했던 교환학생은 별것도 없이 막을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교환을 가기 전, 이미 갔다 온 수많은 사람에게 조
드라마/구미호뎐(2020)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존재는 언제나 호기심을 자극한다. 가령, 심해 깊은 곳이나, 광활한 우주 너머에는 무엇이 존재할지에 관한 생각들은 항상 매력적인 이야기 소재가 돼왔다.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구전되어오는 괴담도 그러하다. 괴담에 등장하는 요괴, 귀신, 괴물 등은 일상에서 비켜나 비일상의 영역에 위치하는 신기하고 기이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언뜻 보면 이질적으로 느껴지지만, 우리의 상상력과 가치관이 반영된 존재들이기도 하다. 드라마 ‘구미호뎐’은 한국의 설화적 세계관 속 비인간적 존재들을 그들만의 방
이번 학기부터 학부생을 대상으로 여성학 수업 가운데 를 가르치고 있다. 노동운동에 대한 대학사회의 관심이 1980~90년대와는 상당히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취업을 준비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장기화되고 있어 학생들의 처지는 상당히 힘겨운 상황이다. 취업을 할 수 있는가, 혹은 언제 할 수 있는가, 과연 자신이 원하는 곳에 취업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이슈로 부상한 지도 이미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여성노동 이슈에 관심을 갖고 문제의식을 심화할 수 있도록 무엇을 질문하고 무엇을 논의
본교 수학과를 1981년 졸업하고 동대학원 전산학 석사, 미 매사추세츠공대 전자컴퓨터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큐어소프트 부사장, 파수닷컴 부사장직을 거쳐 2019년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 3대 이사장으로 취임해 3년간 활동했다. 2019년부터 세계여성이사협회(WCD Korea) 비상임이사로도 활동 중이다. 정부의 IT국제표준화전문가(2001~2005년)로 선정됐고 ISLA국제보안전문가상(2015년), 여성정보인대상(2019년) 등을 수상했다.여러분은 혹시 ‘공대 아름이’라고 들어보셨나요? 2008년 한 통신사가 공과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2015년 독일 프라이부르크대에서 하이데거의 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7년 9월부터 본교 철학과에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독일에서 출판된 『Erfahrung und Atmung bei Heidegger(하이데거 철학에서 경험 개념과 숨 개념)』, 역서로는 한병철의 『선불교의 철학』, 하이데거의 『예술 작품의 샘』, 『철학의 근본 물음』, 칼 야스퍼스의 『철학적 생각을 배우는 작은 수업』이 있다. 현재 한국 하이데거 학회 및 Heidegge
영화/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후회의 순간들이 쌓여 삶을 이룬다. 삶은 매 순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과를 두고 “이 순간 이랬더라면”이라고 반추하며 나아가지만 돌이킬 수 없다. 수업에 지각했을 때 일찍 잤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사소한 것부터 어릴 적 꿈을 되돌아보며 포기하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상상하는 것까지, 크고 작은 후회와 이루어지지 않은 여러 가능성으로 삶이 구성된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주인공 에블린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늘 좌절과 실패의 경험이 축적된 인물로 묘사된다. 이토록 아무
2022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이동권 시위가 대한민국을 강타했다. 시민들이 시위를 통해 직접적인 손해를 입으며 ‘멈춤’에 대한 새로운 공론장이 열렸기 때문이다. 전장연은 열차 출입구를 막는 방식으로 지하철 운행을 지연시키며, 원하는 대로 이동하기조차 어려운 장애인 이동권의 현실을 파격적으로 알렸다. 전장연의 행동에 공감한다고 말하는 시민이 있는 반면 전장연 이동권 시위를 두고 일각에선 부정적인 반응을 쏟아냈다. 접근성 낮은 교통시설물과 예산 부족을 문제 삼으며 이어 나간 이 시위가 최근 다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
드라마/작은 아씨들(2022)동명의 소설을 기반으로 하는 tvn 토일드라마 ‘작은 아씨들’이 22년 10월 9일 12부작으로 끝을 맺었다.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 내던져진 자매들은 여전히 우애가 좋지만, 소설 속보다 현실적이고 솔직한 모습을 보여준다. 박찬욱 감독과 영화에서 여러 번 합을 맞춘 정서경 작가의 두번째 드라마로, 미술감독 류성희까지 합류해 세간에서는 ‘박찬욱 없는 박찬욱 팀’이라고도 불리운다. 현 사회의 문제점을 냉철하고도 아름답게, 그러나 어딘가 찜찜하게 묘사하는 박찬욱 영화의 특징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드라마라고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