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애프터썬(2022)

출처=영화 스틸컷
출처=영화 스틸컷

<애프터썬> 속 소피와 캘럼이 방문했던 페르시안 카펫 상점, 상인은 말했다. “Each Of These Carpets Tell A Different Story(각각의 카펫은 저마다의 사연을 가졌어요)”.

<애프터썬>은 어른이 된 소피가 아버지 캘럼과 함께 튀르키예에서 보냈던 열한 살 여름 휴가의 기억을 관객에게 ‘엿보이는’ 영화다. 이십여 년 전의 추억이 담긴 캠코더를 조작하는 소피의 손동작은 마치 닫혀 있는 방문을 여는 듯 하다. 조심스레 문고리를 열어젖히듯 재생버튼을 누르는, 이제는 뼈들이 제법 단단하게 여문 소피의 손. 관객은 이 손의 주인인 소피가 영화의 내용에 관해 ‘보이지 않는 편집자’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객관적인 기록으로 기능할 수 있는 캠코더 속 영상의 개수는 영화 속 사건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그마저도 영상의 절반 이상이 호텔에서 촬영되었으며, 서른 살 캘럼이 아닌 캘럼을 인터뷰하는 거울 속 소피 자기 자신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대부분이다. 결국 튀르키예에서의 기억을 상영하는 것이 ‘캠코더’가 아닌 ‘캠코더를 조작하는 서른 살 소피의 손’이며, 영화의 시점이 ‘소피’가 아니라 ‘소피의 기억’이라는 지점에서 <애프터썬>은 특별하다.

영화에서 서른 살, 자신이 열한 살이던 시점 캘럼의 나이가 된 소피는 생일날 악몽에 시달리다 눈을 뜬다. 소피의 발밑에는 캘럼이 튀르키예에서 구입했던 것이자 그의 유품이 된 카펫이 있다. 현재는 생을 마감한 것으로 보이는,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할 수 없게 된 아버지 캘럼에 대한 소피의 방. 소피는 캠코더 속 영상을 재생하는 방식으로 방문을 열어보았을 것이다. 그 속에서 열한 살 휴양지에서의 기억이 차지하는 막대한 부피는 그것이 캘럼과의 마지막 추억이었음을 추측케 한다.

영상을 돌려 보는 것이 캘럼에 대한 소피의 의도적 회상이라면, 애써 닫아둔 그 방 속으로 소피를 자꾸만 부르는 것은 의지와 무관하게 시달려야 하는 악몽이다. 악몽 속 컴컴한 방에는 어지러운 빛줄기 속에서 고통스레 몸부림치는 캘럼이 있다. 악몽은 소피에게 말한다. 소피의 기억 속 클럽 조명 아래 이방인들과 섞여 우스꽝스럽게 춤을 추던 아버지의 모습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그는 실은 우울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이라고. 꿈에서 깨어난 순간에는 늘 막막함과 불안함이 뒤따른다. 소피는 그러한 감정들을 공항을 떠나 온 바로 그 순간부터 수차례 경험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짐했을 것이다. 캘럼의 우울을 본인이 견딜 수 있을만한 크기로 바꾸어야 한다고. 캘럼에 대한 기억의 방에서 어둠 속 희미하게 투영하는 빛줄기 몇 개를 조명이 아닌 태양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시도 때도 없이 손그늘을 만들고, 애프터 썬 로션을 발라야 했을 만큼 눈부시게 작열하는 튀르키예의 태양으로 그 방을 채워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캘럼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고. 보이지 않는 편집자인 소피의 손은 그런 조급함과 간절함을 지녔다. 어른이 된 소피는 그런 마음으로 기억의 카펫을 짜기 시작한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탓에 휴가에서의 일은 또렷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떤 기억은 너무 선명하거나 부풀려져있는 반면, 다른 것들은 흐려지거나 삭제되었다. 심지어는 남아 있는 기억의 선명도마저 그 중요성과 비례하지 않는다. <애프터 썬>은 이러한 기억의 본질을 형식을 통해 보여준다. 이에 영화의 개별 장면 하나하나는 선명한 반면 이야기의 짜임은 때로 성글고 불친절하기까지 하다. 이때 각각의 장면들은 카펫의 개별 패턴 하나에, 소피의 기억은 전체 카펫의 패턴에 대응된다. 또한 영화 속의 시간은 불연속적이며 장면들은 짜깁기된 형태로 구현된다. 당시 사춘기 소녀는 자신의 성장이라는 매혹에 몰두해 있었다. 소피에게 세상의 중심은 온통 본인이었으며, 나이의 한계로 보지 못했거나 포착할 수 없던 수많은 장면들이 있다. 특히 캘럼에 대한 기억은 어른이 된 현재 소피의 상상으로 조형되머 그 결과 관객은 어디까지가 객관적 사실인지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예컨대 소피가 없는 곳에서 아이처럼 흐느끼던 캘럼의 울음, 난간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거나 홀린 듯 밤바다로 걸어 들어가던 뒷모습, 엔딩 장면에서 캠코더를 끄고 외롭게 닫힌 복도로 걸어갈 때 캘럼의 무상한 표정 등이 모두 소피의 상상 속 사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인지한다면 개별 장면들, 즉 패턴 하나하나의 병치가 이뤄낸 추상적 의미이자 카펫 전체의 문양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머릿속에서 새롭게 구성된다. 이는 에이젠슈테인이 <영화 형식에 대한 변증법적 접근>에서 이야기한 이상적인 영화의 ‘형식’ 그리고 ‘지적 영화’의 개념과 부합한다. 그는 예술의 본질이 ‘자연적 존재와 창조적 경향의 충돌’이라 언급했다. ‘형식’이란 자연적 존재인 ‘내용’에 인위적 손질을 부여하는 창조적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에이젠슈타인은 이상적인 영화란 스토리를 위주로 하는 내러티브의 전통으로부터 해방되어 스토리나 ‘일화(anecdote)’의 기능을 최소화하는 ‘이야기 약화(de-anecdotalization)’를 통해 주제를 직접 표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애프터썬>은 형식을 통해 영화가 가진 시각 예술로서 독자적 지위를 성공적으로 구현해 낸 사례다. <애프터썬>은 결코 미흡한 스토리라인을 가졌거나 공감을 위해 관객 개인의 특수한 경험을 요하는 영화가 아니다.

한편 소피에게는 노력해도 볼 수 없는 카펫의 뒷면이 있다는 점은 여전히 슬프다. 소피에게 캘럼은 이제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위로를 받을 수 없는 존재다. 그것이 소피가 먼지 쌓인 캠코더를 열어보는 이유이자 기억의 문고리를 젖혀보는 까닭일 것이다.

누군가 무엇을 건넸지만 자신의 부주의로 놓쳐 버린 날. 실수는 잠깐인데 후회는 너무 길어 가라앉던 날. 물안경을 빠뜨린 게 여전히 자신의 잘못인 것 같은 날. 그런 날들마다 소피는 캘럼이 생각났을 것이다. 새되기만 한 현실의 시간이 도무지 알 수 없는 선택들을 채근할 때면 서른 살의 캘럼이 그때 정말로 너무 어렸다고 되짚다가도, 이내 그 너른 등이 그리워졌을 것이다.

그리고 캘럼이 튀르키예에서 보낸 엽서가 런던으로 날아오던 날, 불쑥 자란 소피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계에서 ‘정말 사랑해, 그것만은 잊지 마’ 라고 아로새겨진 사랑의 확실성과 마주하던 순간, 소피와 캘럼의 카펫은 비로소 그들만의 이야기를 가지게 된다. 그 카펫은 우리의 공감을 갈구하지 않는다. 처음 보는 패턴이라고 해서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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