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미(경영·09년졸) 삼성화재 투자전략파트
송현미(경영·09년졸) 삼성화재 투자전략파트

본교 경영학과를 2009년 졸업하고 삼성화재 해상보험팀으로 입사했다. 일반보험손익파트와 IFRS추진파트를 거쳐 현재 투자전략파트에서 인오가닉 전략수립 및 해외피투자사 관리, 글로벌 신흥시장 B2C 마켓 및 일반보험 시장 확대 전략 기획 등을 맡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MBTI로는 ENFP(재기발랄한 활동가). 사람 만나길 좋아하고 항시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며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충동적 성향까진 갖춘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다는 보험회사에 다니게 될 줄 누가 알았던가. 별 사고 없이 무탈하게 지나가는 하루가 가장 큰 복인 보험회사 말이다. 24세의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글자 크기 6pt의 깨알 같은 활자로 가득 찬 보험약관 같은 삶이 내 앞에 펼쳐질까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때의 나처럼, 재미없어 보이는 삶의 첫 책장을 펼친 이화의 벗들과 지난 13년간의 여정을 나누어보려 한다.

대학 시절의 나는 매일 새로운 일 찾기에 혈안이었다. 각종 연합동아리, 공모전, 봉사활동 등 사람 만나는 것이 좋았고 해보지 않은 일을 시도하는 것도 좋았다. ‘이것저것 하다 보면 나만의 길이 보이겠지’란 생각으로 닥치는 대로 도전하다 보니 졸업반 때 남은 것은 일관성 없는 포트폴리오뿐이었다. 친구들이 4년간 한 우물 파기에 매진 중이었을 때 대체 나는 무얼 한 것인가.

뒤늦은 후회 속에도 ENFP의 본능에 충실해 꿈꿨던 것이 있었는데 바로 해외취업이었다. 미천한 영어 실력이지만, 도전에 두려움이 없던 나에게 이국적 환경에서 파란 눈의 동료들과 일하는 경험은 매일 즐거운 모험일 것 같았다. 그러나, 역시. 실력이 미천해 ‘광탈’. 어설펐던 영문 레주메를 비웃기라도 하듯 줄줄이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눈에 보이는 회사마다 절절한 충성심을 고백한 끝에야 발 담그게 된 곳이 지금의 국내 보험회사였다. 무슨 허영심인지, 보험이 뻔하고 지루해 보였던 그때의 나는 세상이 망한 것만 같았다. 그래도 날 알아봐 준 고마운 회사를 위해 나의 취향을 헌납해야겠지. 이제 남은 건 진공 상태의 우주처럼 고요한 사무실에서 하릴없이 엔터만 치는 지루한 삶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건 이제 막 사회에 발 담근 애송이의 상상이었다. 내가 시작한 곳은 보험계약을 심사하는 언더라이팅(Underwriting) 부서. 선박, 항공과 같은 해상보험 리스크를 분석하고 적정가치를 매겨 계약을 인수하는 업무였다. 대형 화물선이나 대형 헬기를 코앞에서 살펴보니 언더라이터로서 첫발을 내디뎠음을 실감했다. 태어나 처음 알게 된 다채로운 종류의 선박들은 도로 위 흔한 자동차 사고처럼 서로 부딪히고 뒤집히기 일쑤였고, 항공 사고라도 난 날에는 부서 전체가 비상이다. 그리고 그런 위험을 마치 신내림 받은 무당처럼 예측하고 값으로 매기는 일은 새로움 그 자체였다.

선박 리스크를 제대로 알기 위해 중국까지 승선하며 엔진룸을 직접 들여다보기도 하고, 거친 말투의 고객들과 보험 조건에 대해 옥신각신하다 보면 한 해가 훌쩍 가 있었다. 다사다난한 일상을 보내다 보니 단조로운 삶이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언더라이팅을 거쳐, 손익 관리, 회계 프로젝트 등 보험 사업 전반에 익숙해질 무렵 잊고 지냈던 스물네 살의 꿈이 떠올랐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해외취업, 할 수 없다면 여기서 해외 비즈니스를 하면 되지 않을까?

취업과 사내 커리어 체인지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취업은 한 장의 이력서에 적힌 몇 줄만으로 나를 평가하지만, 사내에서는 수년간 쌓아온 경험과 시간의 무게가 무형의 스펙이 된다는 점이다. 보수적인 보험회사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커리어를 변경하는 것에 망설임도 있었지만, 그렇게 손 번쩍 들고 그간 해왔던 일을 밑천 삼아 해외사업부로 옮기게 되었다.

보험회사는 해외사업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인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국내 유수의 보험회사들은 전 세계 각지에 해외법인과 지점을 내고 활발히 현지 영업을 하며 고군분투 중이다. 회사가 해외 지점 등을 통해 직접 사업을 성장시키면 ‘오가닉 그로스(Organic growth)’, 이미 잘하고 있는 다른 회사에 투자하거나 M&A(인수합병) 등의 방식으로 성장을 도모한다면 ‘인오가닉 그로스(Inorganic growth)’라 부른다. 새로운 사업부에서 인오가닉 업무를 맡은 나는 재취업에 성공한 신입사원과 같았다. 분명 같은 회사임에도 전혀 다른 회사처럼 생소한 분위기에 적응하기 위해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다. 파란 눈의 외국인들과 컨콜을 하고, 해외 출장을 가 회사를 대표하는 얼굴로서 파트너사들을 만나기도 하며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흥미진진한 날의 연속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누가 보험회사가 재미없다고 했던가?

오래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알게 된 점이 있다. 그 재미없다는 회사들에도 재미있는 일은 항상 일어난다는 것. 닥치는 대로 두드려 열린 그 문에 일단 발을 담그면, 황무지 같은 일상에 반드시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지는 법이다. 내가 다닐 회사가 재미없어 보여 걱정이라면 조직도를 한 번 펼쳐보시길. 흙 속의 진주처럼 나를 기다리는 포지션이 어느 순간 영롱하게 빛을 발할 수도 있다.

이 순간, 누군가는 원하지 않은 회사에 지원서를 써야 함에 속상하고, 누군가는 재미없는 사무실에 출근하는 것이 망설여질지 모른다. 하지만 이왕 직장인의 삶을 선택한 벗들이여! 우리가 가는 길을 통째로 바꾸지 않아도 된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도착한 그곳에서 조금만 시야를 넓히면 가까운 곳에 나만을 위한 재미가 있을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무궁무진한 재미를 캐낼 지혜로운 벗들의 시작을 응원한다.

송현미(경영·09년졸) 삼성화재 투자전략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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