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충수 철학과 교수
한충수 철학과 교수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2015년 독일 프라이부르크대에서 하이데거의 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7년 9월부터 본교 철학과에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독일에서 출판된 『Erfahrung und Atmung bei Heidegger(하이데거 철학에서 경험 개념과 숨 개념)』, 역서로는 한병철의 『선불교의 철학』, 하이데거의 『예술 작품의 샘』, 『철학의 근본 물음』, 칼 야스퍼스의 『철학적 생각을 배우는 작은 수업』이 있다. 현재 한국 하이데거 학회 및 Heidegger Circle in Asia에서 활동하며 국내외 하이데거 철학 연구에 기여하고 있다.

제가 지금 쓰는 글이 포함될 칼럼 시리즈의 이름은 ‘읽어야 산다’입니다. 시리즈는 학생들에게 독서를 장려하자는 취지로 2019년부터 시작됐다고 합니다. 두 개의 단어로 된 간략한 이름에서 저는 강렬한 첫인상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먹어야 산다’라는 문장을 연상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먹지 않으면 살 수 없고,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먹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읽어야 산다’에서 ‘살려면 꼭 읽어야 한다’라는 절실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펜을 드니 제 첫인상이 다소 부정확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일단 ‘먹어야 산다’와 ‘읽어야 산다’에서 삶은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첫 번째 문장에서의 삶은 생명 유지를 뜻하고, 두 번째 문장에서의 삶은 인생을 가리킵니다. 게다가 사람이 살아갈 때 먹기와 읽기는 서로 다른 무게를 가집니다. 사람이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으나 살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문자 없이도 인류는 긴 역사를 살아왔습니다. 따라서 ‘먹어야 산다’와 ‘읽어야 산다’는 서로 연상되는 병렬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 문장 사이에는 일종의 직렬 관계가 있는 듯합니다. 굶주림에 시달리는 빈곤한 사회에서는 먹는 일이 삶에서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회가 기아에서 벗어나고 전반적으로 부유해져서 여가 생활에 관한 관심이 늘어난다면, 다른 일들이 삶에서 더 중요해질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다른 일을 스스로 찾아내 즐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아마 이 칼럼 시리즈를 기획한 편집자는 독서가 그중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생각에 저도 공감합니다.

저희의 생각에 따르면, 삶이 목적이고 읽기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철학자들은 종종 거꾸로 생각합니다. 가령 니체는 플라톤의 철학을, 마르크스는 헤겔의 철학을 거꾸로 뒤집어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삶과 읽기의 관계를 한번 거꾸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읽기가 목적이고 삶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수단으로서의 삶, 즉 읽기 위하여 사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이러한 삶이 생소할 수도 있어서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겠습니다.

학교나 직장에서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담한 서점을 방문해 책들을 둘러보는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려 봅시다. 읽고 싶은 책을 하나 사서 설레는 마음으로 귀가합니다. 간단히 씻고 저녁을 먹고 집안일도 합니다. 이제부터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는 자유 시간입니다. 아까 사 온 신선한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을 만나면 그 의미를 곱씹어 읽고, 친구들과 그 구절을 나누기도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뿌듯해짐을 느끼고 그 기쁨에 젖어 꿈나라에 듭니다.

저녁마다 1시간 정도 이렇게 책을 읽는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내서 독서를 하려면 다른 일들을 좀 더 효율적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수면 시간을 조금 줄여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루에 나머지 23시간의 삶은 1시간의 읽기를 위한 수단이 될 것입니다. 23시간에 비하면 1시간은 짧은 시간입니다. 하지만 저녁의 독서는 단잠과 상쾌한 아침을 선물해주고 기분 좋은 하루를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1시간은 23시간보다 물리적으로는 짧으나 심리적으로는 더 긴 시간일 것입니다.

이러한 역설이 가능한 이유는 시간에 가로의 너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로의 높이도 있기 때문입니다. 등산을 예로 들어 시간의 역설을 설명해보겠습니다. 산의 꼭대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긴 시간 산을 타야 합니다. 그렇게 고생 끝에 도달한 정상에 머무르는 시간은 짧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 산에서 내려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등산가들은 그 짧은 시간의 상쾌함을 위해서 힘들고 오랜 산행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 시간에 높이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매일 저녁 책을 읽는 1시간도 짧지만 높을 것입니다. 그 상쾌한 독서는 힘든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읽기 위해 살고 싶어질 것입니다. 이제 읽기가 삶의 목적이 됩니다. 그런데 독서의 시원하고 산뜻한 맛을 아는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고는 더이상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독서가 매우 필요하고 절실한 일입니다. 읽어야 삽니다. 이 칼럼 시리즈의 이름 ‘읽어야 산다’로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제 강렬한 첫인상이 부정확하지 않았나 봅니다.

한충수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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