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시간과 함께 흘러 아프지 않은 것들만 남는다. 시간은 그 조각을 휩쓸며 아름다운 것들만 남긴다. 더는 힘들지 말라는 누군가의 배려일까. 중간고사 한 문제에 정말 목숨을 걸었던 지독했던 학창 시절도 지금 돌아보면 풋풋한 추억이듯이, 그렇게 기억은 아름다운 부분만 남긴 채 흐른다. 우리는 이 남겨진 조각을 추억이라 부른다.

하지만 어떤 조각들은 너무 깊게 박혀버려서 아무리 강한 시간이 지나가도 그 자리에 머문다. 아무런 의도도 없이 투명하게, 계속 그 자리에 머물며 남아있다. 그런 것들은 슬프게도 마음을 아리게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잔인한 투명한 조각들은 우리를 멈춰 세우기도, 때로는 이안류처럼 시간을 역행시켜 그들이 탄생한 시점으로 우리를 데려가기도 한다. 그날의 장소, 날씨, 분위기, 시선, 목소리 하나하나까지. 도망칠 수도 없는 기억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그렇게 아픈 조각들을 게워내며 살아간다.

3월은 시작을 대표하는 달이다. 누군가에게는 입학을,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만남을, 또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도전을 가져온다. 그러나 어떠한 시작도 무(無)에서부터 생겨나지 않는다. 남아있는 기억들이, 작은 조각들이 모여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모두 저마다의 돛을 올리고 희망찬 항해를 시작한다. 미처 흘러가지 못한 아픈 조각들은 때때로 우리의 시작을 방해한다. 아무리 노를 젓고 발버둥을 쳐도 그 자리, 그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성인이 되고 무력함을 느끼기 싫어서 동아리, 아르바이트, 대외활동, 창업팀까지 정말 열심히 움직였다. 몸은 힘들었지만, 상념에 잠겨 괴로운 것보다 훨씬 행복했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종종 좋은 에피소드나 성과가 찾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따금 아픈 조각들이 찾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무너졌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못하고, 무엇도 들리지 않았다. 시간은 흐르는데 나는 계속 그 기억, 그 자리 머문다. 이것도 항해일까, 헤엄이라고는 할 수 있을까. 모두 자신의 속도와 방향을 따라 자유롭게 사는 것 같은데, 간신히 떠 있거나 잠겨있는 나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늘 괴로웠다. 그러다 유리병을 떠올렸다.

바다에서 유리병이 깨지면 어떻게 될까. 우선 날카로운 유리 조각에 베여 상처가 나겠지. 유리병은 조각나고, 파도에 휩쓸린다. 남을 수 있는 조각들은 남고, 흘러가야 하는 조각들은 바다로 떠난다. 흘러갔지만 또다시 와야 하는 조각은 떠내려온다. 확실한 건 유리의 날카로움이 파도 한 번에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만나는 날카로움에 우리는 또 베이고, 아파하고, 상처받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간이 흐르다 보면, 파도가 또 유리 조각을 휩쓴다. 그렇게 잠겨있다 보면, 언젠가 날카롭던 유리는 마모되어 동그랗게 변해있다. 동그란 그 조각을 바다의 숨은 보석이라 부른다더라.

우리가 게워내는 기억들도 언젠가 동그래질 수 있을까. 휩쓸리고 잠겨있다 보면 이걸 보석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날이 올까. 이게 한때 정말 아팠던 조각이라고 웃으며 말하거나, 감히 스스로도 잊어버릴 수 있을 날이 올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아무튼 파도는 계속 칠 거고, 시간은 계속 흐를 거다. 그러다 보면 정말 우리도 무뎌질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오늘도 깨진 유리 조각을 게워내는 모든 이들이 각자의 해방에 가까워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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