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해가 지는 곳으로(2017)

출처=알라딘
출처=알라딘

태어났으니 그저 살아갈 뿐인 나는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같은 존재론적 질문 앞에서 말문이 턱 막히곤 한다. 핑계는 고리타분하다. 경쟁과 자본주의적 욕망으로 점철된 대한민국에 사는 탓에 삶, 탄생과 죽음에 대해 깊이 고찰해 볼 시간이 없었다고. 마치 “일을 하지 않으면 금방 가난해”지므로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을 포기해야 했”던 ‘류’처럼 말이다. 찰나뿐인 철학적 사유는 명확하게 매듭지어지지 못하고 모호하게 끝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내가 조심스레 말하건대, 인간이 저마다의 불행을 끌어안고서도 기어이 살아가는 이유는 그들이 동시에 품고 있는 옅은 희망 때문일 것이다.

최진영 작가는 ‘해가 지는 곳으로’라는 장편소설을 앞세워 보다 명확한 답을 내어놓는다. 그의 답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해서,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받기 위해서.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를 피해 한국을 떠난 인물들은 재난의 정중앙에서 처절하게, 또한 아름답게 사랑한다. 주목할 만한 점은 작가가 ‘약자’에게만 발언권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여성, 장애인, 청소년, 성소수자의 정체성을 가진 그들의 사랑이 유구하게 소외되어 왔기 때문일까. 반면 ‘강자’인 비 청소년-남성은 발언권과 사랑 대신 총칼을 들었고, 텍스트 위에 선명하게 동시에 흐릿하게 존재하다가 이름을 감춘다. 이러한 전복이 독자에게 묻는다. 그렇다면 어느 곳이 지옥인가?

‘약자’들은 멸망한 러시아 땅 위에서라야 사랑을 거머쥔다. 인간에게 사랑이란 어떤 존재이며, 소위 말하는 ‘정상적인’ 사랑은 도대체 무엇인가? 가족 간의 무조건적 사랑, 여성과 남성의 사랑 정도로 추려지는 정상성은 작품 안에서 완전히 뒤집힌다. 종말 직전의 우리는 누구든 사랑할 수 있고, 누구든 증오할 수 있다. 설령 그 대상이 길가에서 처음 만난 동성의 또래이거나 가족일지라도. 최진영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이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로 출간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은 이유는 철저히 비가시화되어 왔던 사랑의 가능성을 확장한 데 있을 것이다.

개중에서도 돋보이는 것은 역시 지나와 도리, 두 여성의 관계다. 지나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도리와 그의 동생 미소를 탑차에 태우길 바랐고, 도리는 지나 가족에게 멸시받을지언정 자신과 미소의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들은 진정 결이 다른 사람이다. 지나는 황폐한 현실 속에서도 농담과 웃음을 잃지 않으려 하지만, 도리는 오래전에 체념하여 세상이 허락하는 한 늦게 종말로 향하려는 것 같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지키고 싶은 것이 있고, 은연중에 인간의 온기를 갈구한다. 그리하여 하나 될 수 있었다. 멸망을 유예하는 도리가 지나에게 물들어가는 과정은 가히 다채롭다. 동경, 미움, 애정, 끝내 사랑. 도처에 널린 불행과 위협을 딛고 “겨울의 심장” 위에 피워낸 사랑에 어떻게 감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작중 인물들은 한국으로 회귀하는 대신 새로운 시작점을 찾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자연히 ‘봄’을 떠올린다. 류는 남편에게 한국으로 “돌아가는 동안 이 땅에는 봄이 올 거”라며 항변한다. 도리는 폐허가 된 도시 위에서 “인간은 인간을 나락으로 떨어뜨리지만 자연이 그 속도를 늦춰 줄 것”이므로 “어서 봄이 와야 한다”고 독백한다. 사계절을 지나 돌아오는 봄은 새 시작을 알리는 계절과도 같아서, 버석거리다 바스러질 미래일지언정 자꾸만 꿈을 꾸게 한다. 다가오는 봄을 바라보며 그들은, 또 우리는 얼마나 다채로운 미래를 꿈꾸는가.

한편, 여생을 위해 움직이는 인물들의 능동성이 돋보인다. 그들은 멀거니 봄을 기다리고만 있지 않는다. 잃어버린 것을 “저절로 다시 만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기꺼이 직접 움직인다. 막연하고 두려워도 방향을 설정한다, 기적을 향해. 기적이라는 말은 진작 사치가, 사어(死語)가 되어 버렸을 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나아가는 인물을 통해 작가는 따뜻한 메시지를 전한다. 이미 망해 버린 세계가 망한 채로나마 존재하는 이유는, 그 속에서도 사람들이 나름의 안식처를 찾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극한의 상황에서 기적을 바라는 마음과 인간의 온기가 잔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희망을 잃지 않을 것. 돌아올 봄을 힘껏 껴안을 것. 사랑하고 또 사랑할 것. 이제는 우리의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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