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0년 7월 헌법재판소(헌재)는 여자대학교들에 설치된 로스쿨과 약대가 “헌법 상 평등권을 침해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당시 약대 편입학을 준비하고 있던 한 학생이 여대들에 배정된 보건·의료계열 정원이 “직업 선택의 자유와 평등권을 침해”한다고 헌법소원을 제기한 것에 대해, 헌재가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여대들에 설치된 로스쿨이나 의대, 약대를 둘러싼 논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2009년에도 세 명의 남성이 이화여대 로스쿨에 대해 남성 역차별을 이유로 헌법소원을 제기함으로써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사건 역시 2013년 합헌 판결로 마무리된 바가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올바른 판단을 내린 헌재에 박수를 보내고, 헌법소원을 제기한 사람들의 근시안적 사고를 비판할 것인가? 각종 국가고시에서 이화여대 출신이 거둔 우수한 실적을 내세우거나 혹은 여전히 강고한 유리 천장과 아직도 만연한 불평등을 다시 한번 강조할 것인가? 물론 이러한 대응은 수긍할만 하고 또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할까?

문제는 좁게는 우리 이화여대의 운명이, 넓게는 여자대학교 전체의 존립 기반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여대들에 설치된 로스쿨이나 의약대를 둘러싼 시비는 지난 10여 년 간 지속되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비슷한 시비가 끊임없이 벌어지리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지금까지 법원은 대학의 자율성 보장과 성평등 달성을 이유로 현행 제도를 옹호했다. 앞으로도 반드시 그럴 것이라고 장담하지 못한다. 정권이 바뀌고, 법원의 구성원이 변한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다. 자유의 원칙이 대학의 자율성 대신 (남)학생의 대학 선택권으로, 평등의 원칙이 성평등 달성이 아니라 (남성을 향한) 역차별의 교정으로 해석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할까? 그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역사는 우리에게 미래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 지혜를 줄까? 사학과 교수로서 마땅히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지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이화여대가 세계사적으로 지니는 독특한 성격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둘러봐도 이화여대와 같은 대학은 하나도 없었다. 따라서 안타깝게도 우리는 다른 누군가가 남긴 족적을 따를 수 없다.

물론 세상에는 한때 여대가 많았고, 게중에는 우리보다 유명했던 곳도 꽤 있었다. 특히 공립학교 중심의 유럽에 비해 사립대학의 전통이 발달했던 미국에서 일찍부터 명문 여대들이 번성했다. 매사추세츠의 위치한 미국 최초의 여대 마운트 홀리오크(Mount Holyoke College)를 시작으로, 북동부 명문 여대들을 지칭하는 이른바 7공주들(Seven Sisters)이 19세기 중후반 하나 둘 들어섰다. 곧이어 미국 각지에 내로라하는 여대들이 속속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미국의 여대들은 급격히 무너졌다. 1960년대 중반 280개를 넘어섰던 여대의 수가 2023년 현재 26개까지 폭락했다. 구체적인 양상이야 학교마다 달랐으나, 근본적 이유는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다. 교육에 있어서 성평등의 진전이 바로 그것이다. 아이비리그를 위시해 역사적으로 남성만 받았던 전통의 명문대학들이 여성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컬럼비아와의 통합과 독자적인 혼성대학 노선 모두를 거부했던 바너드(Barnard College)를 비롯하여 소수의 학교가 전통을 지키기 위해 여대로 남았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시대의 큰 흐름이 여대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우리도 미국 여대들을 좇아 혼성대학으로 변신해야 할까? 하지만 그것이 바람직하냐를 따지기 전에 이 전략은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사실 미국에서 명문여대들은 대개 학부대학(liberal arts college)이었고, 따라서 다른 학교와의 통합이나 혼성대학으로의 변신이 상대적으로 쉬웠다. 이화여대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우리는 학과와 협동과정을 합쳐 모집단위가 80개에 달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대학원을 지닌 학교다. 미국이나 유럽, 혹은 다른 선진국에서 이러한 유형의 여대는 지금도 없고, 과거에도 없었다.

한국의 특수한 역사는 이화여대를 세계적으로 특별한 학교로 만들었다. 우리의 미래는 이러한 상황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다른 선진국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교육에 있어서 성평등은 불완전하나마 한걸음씩 전진하고 있다. 어쩌면 그 걸음의 크기만큼 국내에서 우리의 존재의 필요성은 줄어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로 눈을 돌려보면 이야기가 다르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위치한 세계 최대의 여자대학(Princess Nourah Bint Abdulrahman University)을 비롯해 오늘날 규모가 큰 여대들은 인도와 파키스탄, 오만, UAE 등지에 분포한다. 이 지역들은 여성 고등교육이 절실하게 요구되지만 그것을 위한 제도와 경험이 부족한 곳이다.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해 줄 수 있는 학교는 종합대학인 한국의 여대들 외에는 없다. 그중에서 가장 큰 인적 · 제도적 자원을 지닌 기관은 말할 것도 없이 이화여대이다. 이것이 바로 전통의 명문여대가 미국에 아직 몇몇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조사에서 이화여대를 “세계 최고의 여자대학교”로 꼽는 이유이다. 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의 여대들로부터 오는 학부와 대학원 유학생들은 우리가 학령인구 감소라는 도전을 극복하게 도와줄 것이며, 그들과의 교류는 우리가 국제적인 시각과 제도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추동할 것이다.

이화여대가 여자대학교로 남을 수밖에 없다면, 혹은 자랑스럽게 그렇게 하기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새로운 과업을 찾아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에 별다른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지역 여자대학들과의 협력은 세계에서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임과 동시에, 어떤 면에서 오직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새로운 역사적 과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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