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학기, 대학 캠퍼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로 가득 차 있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이 웃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배움을 위해 눈을 반짝이며 질문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수업하는 즐거움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청년들의 취업과 독립 문제를 다룬 소설을 함께 읽으면서 오늘날 우리가 감내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현실의 고달픔을 누군가에게 표현하지도 못하고 홀로 인내해야 했던 학생들이 자신의 마음을 내보일 때면, 문학 속 현실을 어떻게 재맥락화하고, 학생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남겨야 할지 다시 고민하게 된다.

21세기 초에 패배자라는 사실을 근거로 “더욱 처절하게 실패해줄 의향이 있음을 공론화하는 한국문학의 청춘들”(‘2000년대 벼랑끝 청춘들, 싸구려 커피의 발원지’)이 등장했다. 사회의 시스템 속에 편입되지 않는 백수들은 무모한 방식으로 사회에 저항하는 존재들이었다. 최근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시선에서 형상화된 한국 소설 속 청춘들은 무기력하거나 이기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사회의 부조리함과 자신의 취약성을 인지하지만, 잘못된 구조를 재편하기 위한 노력이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성세대로서 오늘날 청년의 존재성을 함부로 비판하거나 재단하는 것은 옳지 못한 행동이다.

장류진의 ‘펀펀 페스티벌’은 취업을 잘하기 위해 대학 시절 내내 부단히 노력했지만, 입사에서 매번 탈락한 ‘지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원은 자신이 희망하던 회사의 면접을 통과하기 위해 합숙 공연 연습에 열심히 참여한다. 처음에 그녀는 ‘과정’이 중요할 것이라 여기며, 팀원 간에 원활한 소통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 지원이 속한 ‘밴드’ 조에서 합격자는 보컬과 키보드 등 핵심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었다. ‘카스텔’ 조에서도 꼭대기부터 셋째 줄까지 맨 위에 올라가 있던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합격했다. 그 상황에서 지원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걔네는 그냥, 그런 데 올라가는 애들”이었다고 여기며, 체념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에 ‘자신의 쪼’대로 노래를 부르면서, 다시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태도를 갖게 된다. 이러한 지원의 모습은 위축되기 쉬운 사회에서 나만의 방식을 고집해 보는 긍정적 자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취업을 앞둔 학생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합격의 문이 지나치게 좁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취업의 기회가 차별적이거나 경쟁이 불공정하다고 여겨질 때, 현실을 버텨냈던 인내심은 좌절되기 쉽다. 오늘날 기성세대는 청년들에게 “열심히 한 만큼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금수저’(2022)와 같은 스토리가 대중의 공감을 사기도 한다. 이 드라마는 우연히 한 할머니에게 금수저를 얻게 된 가난한 집 남학생이 부잣집 남학생의 삶을 살게 되는 마법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금수저’란 부모의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그 자녀가 쉽게 이어 나가는 현 세태를 반영한 단어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친부모를 외면하면서까지 남들보다 더 많은 물질적 혜택을 누리려는 주인공의 욕망은 기이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동시에 계층상승의 통로가 좁아진 현 사회의 어두운 면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현실 아래서 우리는 돈과 성과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심리를 합리화하기가 쉽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단한 성과를 낼 수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우울함에 빠질 수밖에 없다. 중요한 사실은 개인을 무기력한 존재로만 간주한다면, 타인과의 연대를 통한 희망적 미래도 꿈꾸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장류진은 ‘달까지 가자’에서 ‘가상화폐’를 통해 청년들의 욕망을 충족하는데,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누구든 좋은 걸, 더 좋은 걸 누릴 자격이 있어.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 그러나 이 대사를 다른 방식으로 써보고 싶다. “세상을 살다 보면, ‘더 좋은 걸’ 누리는 사람들을 알게 된다. 그런데 나는 더 좋은 걸 ‘함께’ 누릴 수 있는 사회를 꿈꿔보고 싶다.”

진로를 고민하는 대학생들은 친구와 오늘 있었던 재미있는 사건을 이야기하다가도, 정확히 판단할 수 없는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면, 문득 두려운 감정이 들기도 할 것이다. 내가 열심히 보낸 하루를 더욱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꿈꾸는 미래가 도래할 수 없다는 불안감 때문에 현재를 고통스럽게 사유하기보다는 나와 같은 걱정을 하는 친구의 손을 꼭 잡고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일 수 있다. 노력한 결과를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나의 고통만 발화할 것이 아니라, 나와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 다른 친구들의 상황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서로를 보듬는 마음의 연대를 시작할 때, 사회는 조금이나마 바뀔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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