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중순, 꽃샘추위가 내려앉으니, 거리에 다시 눕시(Nuptse)가 늘어난다. 등산용품 회사 노스페이스(The North Face)에서 만든 짧은 패딩 눕시. 지난겨울에도 이게 교복인가 싶을 정도로 사방이 눕시였다. 눕시 사랑은 옷 좀 입는다는 셀럽들로부터 시작해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세대도 뛰어넘고, 서울이고 뉴욕이고 동서양도 인종도 모두 뛰어넘는다고 한다. 롱패딩 유행이 엊그제 같은데 눕시가 유행하는 바람에 엄마, 아빠들은 졸지에 아이들 입던 롱패딩을 물려 입고서 노스페이스 매장에 들어가 카드를 긁었다. 눕시 유행에 힘입어 노스페이스 매출은 1조를 눈앞에 두고 있고, 노스페이스를 가져다가 우리나라에서 파는 회사인 영원무역홀딩스의 주가도 급등했다 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돈 많이 버는 노스페이스는 대체 어떤 부자의 것일까?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부자들은 장소를 옮길 때마다 인사를 받는 특징이 있다. 차에서 내릴 때나 건물에서 나올 때 어김없이 누군가에게 폴더 인사를 받는다. 그런데 부자 A씨가 인사를 받는 장면을 조금 더 확대해서 살펴보면 인사를 받는 것은 A씨가 아니라 A씨의 돈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A씨에게 돈이 없다면 A씨는 인사를 받지 못할 것이고, A씨와 돈은 혼연일체가 아니라 엄연히 별개의 존재이므로 폴더 인사는 A씨가 받은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부자는 인사를 받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데리고 다니는 (강아지가 아니라) 돈에 인사를 받게 하는 사람이다. (고양이의 집사가 아니라) 돈의 집사라고나 할까. 자기가 데리고 다니는 돈에 누군가가 인사를 제대로 안 하면 돈 대신 화까지 내준다. ‘땅콩이 왜 접시 위가 아니라 봉지 안에 들어 있는지’, ‘라면이 왜 짠지’ 등등 항공기 승무원을 당황하게 만드는 다소 철학적이랄까 창의적이랄까 그런 분노를 섞어 가면서 말이다. 어쨌거나 돈이 100억이 있든 500억이 있든 1000억이 있든 많은 부자가 더 많은 돈에 인사시키기 위해 평생을 달린다. 그리고 어느덧 무덤에 도착한 이후에는 자신의 기일 외에는 인사를 잘 받지 못한다.

노스페이스의 창업주는 어땠을까? 노스 페이스를 만든 더글러스 톰킨스(Douglas Tompkins)는 노스페이스만 창업한 것이 아니라, 에스프리(Esprit)도 아내와 공동으로 창업했다. 에스프리는 요즘으로 치면 자라(Zara)나 유니클로(Uniqlo), 혹은 갭(Gap) 같은 거대 의류 기업이었으니 톰킨스는 틀림없는 부자다. 그런데 그는 “이 옷 꼭 필요한 거 아니면 사지 마시오”라고 자기 회사 옷을 사 지 말라는 기이한 광고를 하더니 이혼하고 전 재산을 팔아 그 돈을 들고 칠레로 간다. 그는 등산용품 회사인 파타고니아(Patagonia)의 CEO이자 재혼한 아내인 크리스틴 톰킨스(Kristine Tompkins)와 함께 1991년부터 수천억을 들여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광활한 초원과 습지, 해양을 엄청나게 사들인다. 그리고 과도한 양식이나 목축 등으로 망가진 그곳 생태계와 자연을 돌보기 시작한다. 그 돌봄으로 회복된 땅과 바다를 칠레와 아르헨티나 정부에 기증한다. 단, 그 지역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는 조건으로. 이렇게 만들어지거나 확장중인 국립공원이 17개이고 톰킨스 환경보호재단(Tompkins Conservation)에 의해 보존되고 있는 땅은 서울 면적의 약 10배인 6070㎢에 이른다. 더글러스 톰킨스는 2015년에 돌아가셨고, 무덤에 돈을 묻어둔 것도 아닌데 지금도 매일 사람들은 물론이고 자연으로부터도 인사를 받는다. 그리고 크리스틴 톰킨스가 같은 돌봄을 이 순간에도 베풀고 있다.

그래, 돌봄. 훌륭하다. 그러니 일단은 부자부터 되는 게 급하다. 창업이 길이다. 창업해서 돈을 엄청나게 벌고 나서 나도 톰킨스 부부와 같은 돌봄 부자의 길을 걸어야지. 하지만 어쩌나. 이미 우리는 유전자 복권에 당첨이 되어 버렸다. 지금 이대학보를 읽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상당히 당첨 확률이 낮은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증거. 게다가 유전자 복권은 돈으로 교환이 잘 안되는 경우도 있지만(물론 여러분들의 유전자 복권이 돈으로 잘 교환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다른 누군가를 돌보고 도울 능력으로는 꼭 교환이 된다. 톰킨스 부부에게는 돈이 있고 우리에게는 능력이 있다. 돈이든 능력이든 권력이든 명품이든 모두 이치는 같다. 그것들 모두 내가 아니라 내가 데리고 다니는 무언가일 뿐이다. 그것으로 어떤 인사를 받고 살지는 우리의 선택.

한 인터뷰에서 ‘무엇을 남길지’를 묻는 말에 대해 더글러스 톰킨스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 죽고 난 후에도 사람들이 여기 와서 이 땅 위를 거닐 거잖아요. 예쁘게 꾸며 놓은 무덤보다 이 땅이 더 낫지 않아요?” 내 돈 들여 땅을 사서 돌본 후 국가에 기부한다고 짜릿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데리고 다니는 돈에 제대로 인사하지 않았다고 땅콩이나 라면에 관한 창의적인 질문을 던져 상대방을 궁지로 몬 다음 시원하게 화를 한 번 뿜어주는 그런 짜릿함. 그러나 짜릿함을 포기하면 곧바로 생기는 마음의 빈자리에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 나오는 은은한 기쁨이 찾아와 머무른다. 순간적인 짜릿함도 행복하고 은은하니 오래 가는 기쁨도 행복하다. 이 봄, 이화의 나는 어떤 행복을 따라다니는 유전자 부자가 되어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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