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강 주간이다. 매 학기 개강을 맞이하지만, 유독 이번 학기는 학교에 생기가 가득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마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 강의가 병행되던 시기가끝나고 상당수 교양과목과 인문대 전공과목의 강의실로 사용되는 학관이 문을 연 후 맞이한 첫 번째 3월 개강이라 그런 듯하다. 이제야 비로소 긴 코로나 시기가 끝나고 신입생을 맞이한 것만 같다.

코로나 시기 동안 대학은 강의만이 아니라 학생들의 각종 대면활동들을 어떻게 원활히 진행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한 반에 배정되면 1년간 일상을 나누며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는 고등학교 시절까지와는 다르게 대학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도 사귀지 않고 졸업할 수 있다. 대면 활동이 제약된 상황에서 타인에게 다가가려는 용기와 노력을 학생들이 기꺼이 감수하려 할까? 학생들이 ‘관계 맺기’를 거부하거나 경험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 이것이 코로나 시기 대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공통된 고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본격적인 새 학기가 시작되는 지금, 이화 안에서 새로운 친구 사귀기를 앞둔 여러분에게 우정, 특히 역사 속 여성의 우정과 그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려한다.

여성의 우정이 공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서구의 역사에서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후 17세기까지 거의 모든 우정에 관한 기록은 남성의 사례에 국한됐다. 남성의 우정은 개인적 행복뿐만 아니라 시민적·군사적 유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로 찬양을 받았다. 고대 그리스에서 우정을 인간의 애착 가운데 가장 고귀한 형태라고 말했을 때, (다른 많은 일과 마찬가지로) 여성은 고민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여성이 남성과 ‘우정의 공적 얼굴을 나눠 갖게 된 것’은 라틴어가 아닌 토착어로 문자 생활을 영위하면서부터였으며, 18세기 살롱이 등장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여성의 우정과 그 가치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여성의 우정에 관하여: 자매애에서 동성애까지 그 친밀한 관계의 역사’(메릴린 옐롬·테리사 도너번 브라운))

한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역사 속 여성의 우정을 주제로 한 연구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한글 창제 이후에 직접적으로 여성의 목소리가 기록되기 시작했지만, 우정을 쌓기 위한 시공간이 주어지고 그 가치를 기록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여성들의 (대체로 가족관계에 기초한) 우애를 제외하면, 근대 여성 교육이 시작되고서야 본격적으로 여성의 우정이 공적 논의의 장에 등장하였다. 그리고 이때의 우정에는 일상과 감정의 교류를 넘어선 학문과 지성의 교감이 있었다.

한국 신여성의 대표자로 손꼽히는 김원주와 나혜석의 교류에서 그 일면을 볼 수 있다. 김원주와 나혜석이 언제, 어떻게 처음 만나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김원주의 이화학당 동기이자 나혜석의 친구였던 박충애가 중간 역할을 했을 것이라거나 이화학당의 문예동아리이던 이문회를 통해 알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정 정도가 있다. (‘나혜석 문학연구’(서정자)) 이후 두 사람은 <신여자>에 나란히 글을 싣거나 <동아일보> 등 지면상에서 논쟁하거나 여성의 정조관념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의 글을 발표하는 등 경쟁하고 응원하며 함께 ‘신여성의 삶’을 살아냈다. 훗날 김원주는 승려가 되었고 나혜석은 세간에서 잊혔지만, 이혼 후 나혜석이 승려가 된 김원주를 찾아갔던 일화는 둘의 우정을, 삶의 궤적이 비슷했던 오직 두 사람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오직 두 사람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여성의 우정으로 마거릿 미드(Margaret Mead)와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의 사례도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여성 인류학자인 두 사람은 버나드 대학에서 만나 열다섯이라는 나이 차이를 뛰어넘고 인류학을 매개로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재능과 지성의 격차가 현격하게 벌어지는 순간 우정이 위태로워진다고 믿었던’ (‘글쓰는 여자들의 특별한 친구’(서정자)) 두 사람은 남성 위주의 학계에서 서로의 글을 모조리 읽어주며 평생을 경쟁하고 격려하고 응원했다. 베네딕트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베네딕트의 언어로 베네딕트의 전기를 쓴 인물도 미드였다.

대학은 같은 나이, 같은 반이라는 이유로 친구가 되는 단계에서 벗어나 우정을 확장하는 첫 번째 단계이다. 나는 이화에서 서로 다른 나이대의 좌표로 삼을 친구, 나를 성장시키는 친구, 연인과 같은 친구, 지지대와 같은 친구를 얻었다. 강의실에서 사제지간으로 만났으나 언니 동생의 관계를 거쳐 지적 자극을 주고받는 친구로 발전한 관계도 있다. 이화인이 서로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용어 ‘벗’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이 서로 통해 가깝게 사귀는 사람이라 한다. 새로운 친구 사귐의 출발선에 선 여러분이 마음과 지성을 나눌 평생의 친구를 이화 안에서 만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그리고 나의 미래에도 여러분이 벗으로 자리 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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