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 사회를 대표하는 특징 중 하나는 ‘혐오’이다. 혐오표현은 사회경제적 위기에 화풀이 대상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특정 집단을 사회적으로 소외시키는 선동적 형태로 나타난다. 자신의 의사를 정확히 표현해 대항할 수 없는 아동은 가장 손쉬운 혐오 대상이 된다. 아이 출입을 거부하는 노키즈존의 증가, 기차나 비행기에서 아이가 울거나 시끄럽다는 이유로 부모를 폭행해 논란이 된 사건은 아동에 대한 혐오, 아동을 통제하지 못하는 부모에 대한 혐오가 공기처럼 퍼져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개 혐오는 무지와 무시에서 나온다. 아동 혐오가 확산되는 이유도 아동의 발달특성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부족한 것에서 기인한다. 아동은 발달특성상 언어적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전까지 울음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한다. 뛰어다니는 행위는 아이들의 가장 원초적 활동이기에 식당이나 카페 같은 실내공간에서도 아이 스스로, 혹은 부모 지도로 완벽히 차단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아동들의 이런 특성을 알고 있지만, 아동을 배제하고 혐오하는 사회 현상을 보면, 알고 있는 것과 공감하는 것은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공감은 아동의 발달적 특성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에 맞춰 적절한 지도와 배려, 대안을 마련해주는 실천적 행위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과거에 사람들 앞에서 부모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주변 사람들에게 불편감을 주면서 자랐고 동시에 많은 어른들의 따뜻한 이해와 공감 속에서 성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노키즈존으로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아동들에게 ‘너희는 문제의 소지가 있다’는 것을 내면화시키는 일이며, 사회로부터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느끼게 만들 뿐이다. 어린 시절 보호와 배려를 받지 못한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갑자기 배려 많은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아동들의 발달적 특성을 알고 있는 것을 넘어 공감해주고 배려할 때, 우리 아이들은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

아동혐오는 미디어 내에서 예쁘고 귀여운 아이들의 모습만을 선택적으로 소비시킨 결과에서도 비롯된다. 육아를 해본 사람이라면 아동들이 방긋 웃으며 잘 지내기도 하지만 울거나 보채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디어에서는 육아를 하는 동안 부모가 얼마나 많은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발휘해야 하는지는 잘 비춰주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키우기 쉬운 ‘귀여운 아동’에 대한 기대감을 무의식적으로 심어주는 미디어는 잘못된 아동관을 양산하고 현실적인 육아의 모습을 왜곡한다. 떼쓰거나 우는 아동, 그 아동을 쉽게 통제하지 못하는 부모, 아이의 기저귀와 분유를 한꺼번에 해결하느라 우왕좌왕하는 부모의 모습은 육아에서 매우 일상적인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있는 아이와 부모로 낙인 찍힌다. 이런 혐오 속에서 살게 되면 일상이 재난이고 공동체는 지옥이 된다.

따라서 아동이 가진 발달적 특수성을 혐오와 배제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우리 사회의 특별한 돌봄과 보호, 이해와 배려를 필요로 하는 소수자로서 수용되어야 한다. 누구나 어떤 측면에서는 소수자가 될 수밖에 없으므로 서로를 지지하고 연대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동의 미숙함을 당연시하면서 가정 내에서 오롯이 그 미숙함을 모두 보완하기를 종용할 뿐, 성숙을 위한 도움에는 인색하다. 아동이 저지른 실수에 대해 꾸중만 하거나 극단적으로는 그 장소에 대한 출입을 완전히 금지시켜 버린다면 아동이 자신의 경험에서 교훈을 배울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아동을 귀여움의 대상 혹은 보호가 필요한 대상으로만 바라보기보다는 우리와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 바라봐야 한다. 김소영 작가는「어린이라는 세계」에서 아동 역시 사회적 체면이 있고 그것을 손상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으며, 아동 역시 ‘품위있는 어린이’로 살길 바란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품위는 어린이의 품위를 지켜주려는 ‘품위있는 어른’이 있을 때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아동의 소란, 그 부모의 실수에 화가 난다면, 나를 불편하게 하는 분노는 잠시 내려두고, 나도 언젠가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관용하려고 노력해보는 게 어떨까? 그렇게 나부터 아동에 대한 관점과 태도를 변화시킬 때, 우리 사회가 혐오와 배제가 아닌 공감과 연대, 포용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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