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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어버이날이다. 원래 어머니날이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럴 수는 없다는 듯이 아버지도 한자리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관계는 질적으로 다르다. 아이를 가지면 어머니는 몸으로 이를 알기에 모자관계는 명백한 관계다. 그러나 아버지가 한 다리 건너 그 사실을 전해 듣고 자식으로 인지해야 부자관계가 성립된다. 미혼모는 아이 아버지가 없어도 어머니로 인정된다. 반면 미혼부가 아버지로 인정받는 일은 지난한 일이다. 가족관계등록법에서도 혼외자의 출생신고자를 어머니로 제한하고 있다.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는 탯줄로 이어진 매개가 없는 관계이다. 외국으로 입양된 아이들이 자라서 생모를 찾으러 한국으로 돌아온 사례는 많이 접할 수 있다. 비록 한 때 자기를 어떤 이유로 버렸건 간에 어머니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말이다. 반면에 ‘생부’를 찾겠다고 돌아온 입양아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는 인지를 매개로 한다. 아버지가 자식을 인지하여 호적에 올리고 성을 물려주면 부자관계가 성립된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누구라도 성을 물려주면 아버지가 된다는 말이다. 게다가 아버지만 자식에게 ‘호부호형’을 허하는 권리를 갖는 것이 아니다. 자식에게도 자기 마음에 드는 족보를 꾸밀 권리가 있다. 족보를 만드는 것은 자기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함이다. 그래서 ‘내 아버지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의 자식인가?’는 자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데 근본적인 질문이 된다. 프로이트는 신경증 환자들을 관찰하여 이들이 자기 생애를 고쳐 쓰려고 온갖 이야기를 꾸민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나중에 이 이론을 원용하여 이것이 바로 소설의 기원이라고까지 말한 사람도 있다. 실제 가정에서는 어머니보다 존재감이 미미한 아버지이지만 소설이나 연극, 영화에서는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다루는 작품이 훨씬 많다. 아버지는 어머니처럼 자식에게 명백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자식들이 아버지와 관계설정하기가 힘들고, 훨씬 더 갈등 상황에 노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소설이나 연극, 영화에서 아버지가 긍정적으로 묘사된 것은 드문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식에게 선험적 존재인 아버지는 과거 가치와 권위의 상징일 수 있고, 이런 이유로 아버지는 자식의 욕망을 억압하는 기제가 될 수 있다. 이럴 때 오이디푸스적 도식에서 친부살해의 테마가 나올 수도 있고, 과거와 단절하고자 하는 열망이 아버지를 아예 내러티브에서 지워버리고 자수성가한 인물이나 고아를 주인공을 내세울 수도 있다. 신분제 사회는 사라졌지만, 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아버지의 재력이 또 다른 신분제의 근간이 되었다. 그래서 “아부지 뭐 하시노”란 말은, 자식에게는 헤어날 수 없는 현대판 숙명을 상기시킨다. 아버지에게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될 경우, 아버지는 자식에게 억압기제로 인식될 수도 있고, 반대로 무능한 아버지의 경우에는 자식의 앞날을 막는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될 수도 있다. 어머니 손맛은 비교가 불가능한 절대적 가치를 가진 것의 상징으로 거론된다. 반면 아버지가 준 세뱃돈이나 크리스마스 선물은 당장 그날로 비교의 대상이 된다. 어느 문화권에서나 바람직한 아버지에 대한 표상이 있게 마련인데, 자식들이 자라면서 자신의 아버지를 이와 비교하여 실망할 수 있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유산만 남겨주는 것이 아니라 빚도 물려 줄 수 있다. 아버지의 빚을 떠안게 된 자식들은 상속을 거부할 수 있다. 혈연이라는 피의 논리로 아버지와 자식을 숙명적 관계로 묶어 놓던 거대 담론이 사라진 오늘날, 아버지는 더 이상 자식에게 선험적 존재가 아니다. 요즘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아버지들이 자식 앞에서 생쇼를 해야 하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반증한다. 자식에게 아버지로 인정받지 못하면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식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담론을 만든다. 그래서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는 혈연관계로 환원되지 않는 담론적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교수칼럼 | 김도훈 교수(불어불문학과) | 2015-05-04 13:28

어느 방송사의 “배려, 대한민국을 바꿉니다.”라는 캠페인에 귀를 기울입니다. 사람들의 감사한 마음은 오래 가지 않고, 금방 습관화되어 무감각해지는 냄새 같은 것 아닐까요? 은혜는 물에 새긴다 하지 않습니까? 매월 5만원씩 누군가를 도와준다고 합시다. 돈을 받는 사람이 얼마 동안이나 그걸 당연시하지 않고 고마워할까요? 사람은 감사할 일이 계속되어야만 감사한 마음이 계속 유지되고, 또 감사할 일의 형태가 자꾸 바뀌어야만 습관화되지 않습니다. 배려와 선행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 다 감사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지만 선행을 하지 않았다고 누구를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배려 없음은 간혹 비난 받기도 하고 범죄로 간주될 때도 있습니다. 미국 사막 지역의 고속도로에서 차가 고장 나서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모른 체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가는 처벌을 받게 됩니다. 배려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그 사람에게 필요하고 내 처지에서 생각할 때 비교적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나의 행위를 말합니다. 적극적인 친절과 비슷하지요. 배려는 돈이 전혀 들지 않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 뛰어 오는 발소리를 듣고 잠시 기다렸다 함께 올라가는 것, 문을 열고 들어 가다가 뒤따라오는 사람이 다치지 않게 잠시 문을 열고 기다려 주는 것, 주차장에서 혼자 차를 밀고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 감기에 걸렸을 때 마스크를 착용하고 기침할 때 전염을 염려해 조심하는 것, 길에서 긴급 상황이 발생하여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 운전 할 때 다른 차량의 통행로를 생각하며 운전하는 것, 다른 사람의 행위를 비난하기 전에 그 사람 입장에서 나라면 어찌 행동했을 지를 생각해 보는 것 등, 배려의 상황은 우리 생활 속에 널려있습니다. 사회 통합이 우리 사회의 화두이지만, 그럴만한 여건이 조성되어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서로에게 화가 나서 분이 가득한데 화해가 될까요? 갑은 적고 을은 많으니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갑의 선행을 목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그렇지만 실천하는 사람을 찾기는 어려운데, 사람들이 선행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일까요? 갑이 인색해서일까요? 잠시 조사해 보면, 우리 사회에는 스스로 갑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거의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갑이 거의 없는 사회에서 갑의 도리를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요? 스스로 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갑의 도리를 들려주면 은근히 화만 나지 않을까요? 반면에 을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갑의 도리를 듣게 되면 그 역시 갑에 대해 화가 날 것입니다. 결국 그런 사회에서 갑의 도리를 외치는 것은 오히려 갑을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 되는 아이러니가 만들어 질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심리는 이상한 것이어서 사회문제 해결 노력 중에 이런 이상한 아이러니가 자주 발생되는 것 같습니다. 나는 현재 우리 사회는 갑과 을이 서로에게 화가 나있고 미워하는 상태라고 진단합니다. 미운 사람에게 누가 선행을 베풀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하라고 하셨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반면에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웬만하면 선행을 베풀겠지요. 먼저 사회 통합의 여건이 필요합니다. 사회통합을 위해 좋은 뜻으로 한 말이 오히려 분란과 미움, 갈등을 부추긴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외침보다는 생활 속 습관처럼 베풀어지는 작은 배려들이 답이라고 봅니다. 갑과 을 모두의 몸에 밴 배려와 친절로 인해 상호 간의 모든 미움과 분노가 사라진 후라야 서로가 상대방이 마음에 들 것이고 그 후라야 서로 선행을 베풀고 사라진 갑들이 돌아와 사회통합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차! 저와 생각이 다른 어떤 분은 이 글을 읽고 내심 화가 나실 수도 있겠네요. 그 분께 여쭈어 봅니다. 그러면 사회 통합은 포기해야 하나요? 이 상태 이대로 얼마나 더 갑의 도리를 반복하여 얘기하면 사라진 갑이 돌아올까요? 사회통합 없어도 증세로 해결 할 수 있을까요? 저는 현재 상태 그대로라면 증세는 탈세로 이어지고 결국 을에게만 증세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결국은 사랑만이 답이 아닐까요? 꿈 깨라고요?

교수칼럼 | 이영하 교수(수학교육과) | 2015-04-06 19:36

“떨어지는 손수건도 창조자에게는 이 세상을 들어 올리는 지렛대가 될 수 있다.” 이 말은 라는 시로 유명한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말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창의성을 발휘하여 기존과 다른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하는 일에 무수히 직면한다. 창의성의 문을 열기 위해 온갖 애를 써보지만 쉽지는 않다. 창의성 자체가 기존의 정형화된 매뉴얼이나 방법론이 통용되지 않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궁금해진다. 순식간에 손수건을 지렛대로 바꾸게 만드는 창조자들의 비법은 과연 무엇일까? 상상력과 창의성 분야를 연구해오면서 창의적인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느냐고 물으면 분야를 막론하고 돌아오는 대답은 의외로 동일했다. 평소의 메모나 스케치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약간 맥이 풀렸다. 누구나 메모지를 가지고 다니면 획기적인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피터 드러커의 말처럼 쉬운 것이 답일 리 없다. 섣불리 결론을 내지 말자. 메모가 창의성의 비법이 되는 것은 ‘메모를 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메모를 어떻게 했는가’라는 방법 때문이다. 축적된 아이디어가 있어야 창의적인 결과물이 나올 수 있음은 자명하다. 상상력의 대가이자 융합형 인물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경우를 보자. 예술가, 발명가, 건축가, 과학자였던 다빈치는 37세부터 30여 년 동안 7천 페이지에 달하는 노트를 남겼는데, 창작과 관련된 큰 그림에서부터 아주 세밀한 스킬에 이르기까지 아주 세세히 메모해두었다. 예를 들어 ‘발과 얼굴의 상대적 비례’라는 메모에는 “발이 다리에 접합되어 있는 부분에서부터 엄지발가락 끝까지는 턱의 위쪽 부분과 머리카락이 나기 시작하는 부분 사이의 공간만큼 길다. 그리고 이는 얼굴의 6분의 5와 동일하다”고 적혀 있다. 한 몸 안에서 각기 다른 기관들 간의 크기와 비례를 어떠한 추상적인 묘사 없이 스케치와 함께 객관적이고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의 메모와 스케치는 우리에게 유용한 상상력이란 머릿속에서 자기 멋대로 펼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측량하고 연구하고 통찰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그런가 하면 한국인이 좋아하는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지식 백과사전』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열네 살에 백과사전을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거대한 잡동사니 창고 같은 것이었고, 나는 그 안에 내 맘에 드는 것을 모조리 던져 넣었다.” 많은 이의 사랑을 받는 베르베르 소설의 탄생 비밀은 바로 이 같은 채집에 있다. 자신이 진정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것에서 자연스럽게 창의성이 발휘될 수 있다. 나만의 호기심으로 항상 관찰하고, 생각하고, 수집하고 분류하다 보면 예상치 못하는 일이 생겨나고 무엇인가가 나에게로 다가오는 순간이 발생한다. 다빈치나 베르베르만이 아니다. 아스팔트 도로에 난 균열을 트레이싱 페이퍼를 대고 베끼는 작업을 하는 미술가, 자신의 문체를 얻기 위해 여러 작가들의 문체를 필사한 노트를 수십 권 갖고 있는 시인,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거리의 풍경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사진가... 이들은 모두 개인적인 채집 프로젝트를 통해 자신에게 고유한 창작의 방법론을 발전시켜나가고 있는 것이다. 새로움을 꿈꾸는 이화인들이여, 이런 창의성의 대가들의 노하우에 힌트를 얻어 오늘부터 개인 프로젝트를 시작해보자. 누가 시켜서 하는 과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호기심과 흥미로 꾸준히 진행해가는 프로젝트 말이다. 연구하고 싶은 주제를 수학적, 과학적, 건축학적, 문학적, 역사적 방법 등 자신에게 맞는 방법으로 다양하게 탐구하고, 그 결과 얻은 깨달음을 스케치로, 글로 기록해보자. 예컨대 나무에 관심을 가졌다면 여러 나무들을 스케치하고, 만져보고, 관찰하는 과정에서 느낀 것과 알게 된 것을 쓰고, 나무에 대한 책을 찾아보고, 삼림 전문가와 만나보고, 기록하는 노트를 꾸준히 만들어가는 것이다. 다빈치의 노트북처럼 열정을 가진 분야의 ‘자기만의 매뉴얼’을 상세하게 기록하다보면 책으로 출판할 기회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개인의 열정과 개성이 담긴 노트에 창의성의 문을 여는 열쇠가 있다.

교수칼럼 | 조윤경 교수(불어불문학과) | 2015-03-30 19:03

지난 겨울방학 며칠간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야기 하나 할까요? , 작년 가을에 했던 드라마, 소문 들었나요? 나는 ‘본방’은 보지 못하고, 방학동안 20회를 주야장천 보았어요. 하지만 시간이 아깝진 않았어요. 바둑에 인생을 걸었던 청년 장그래가 프로기사로 입단하지 못하고, 고졸 검정고시라는 자격만 갖고 대기업에 인턴, 그리고 계약직으로 2년을 보내는 과정을 담은 내용이죠. 토플, 토익, 제2외국어, 어학연수 등의 스펙 하나 없이,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기'였지요. 수많은 실수로 좌절하고, 주변의 무시하는 시선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죠. 그가 아는 것이라곤 바둑판에서 배운 것 뿐 이거든요. 장그래는 자문하죠. '실패했던 바둑에서 배웠던 원리를, 지금 성공하려고 하는 상사맨의 삶에 적용해도 되는가' 하고. 그런데 성공했건 실패했건, 그리고 프로기사건 상사맨이건, 농부건 교수건, 깊이 들어가면 누구나, 저변을 흐르는 삶의 원리를 깨닫게 된다고 생각해요. '미생'이란 두 집을 짓지 못해 아직 완전히 살지 못한 상태, 즉 상대로부터 언제든지 공격받을 여지가 있는 상태를 뜻하는 바둑용어라죠. 누군가의 공격이 아니라도, 생로병사 등 끊임없는 공격과 마주해야 하는 우리 모두가 미생인 셈이죠. 드라마 제작의 형식적 원칙은 리얼리티죠. 철저하고도 섬세한 장면 재현은 감동적이었어요. 연출자와 시나리오 작가, 배우들과 스텝들이 이토록 열정적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구나 싶으니 말이에요. 그래요, 각자 자기 자리에서 이정도만 해주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내용의 측면에선 보는 사람마다 각기 느낌도 해석도 다르겠지요? 이 시대의 직장인들, 특히나 ?상사맨?들은 그들이 매일 살아가는 ?포성 없는 전쟁터?에서 벌인 무훈담과 실패담으로 목청을 높일 거고, 회사 내의 남녀, 상하 사이의 복잡한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할 테고, 또 젊은이들은 취업난에 계약직의 문제 등 각자 많은 이야기가 있을 거예요. 요즘 젊은 사람들 말로 '꽂힌다'하듯이, 내게 꽂힌 이야기를 해보죠. 13편 마지막 부분이었어요. 장그래의 독백으로 보들레르의 산문시 가 나오는 거예요. 보들레르라 하면 프랑스 현대시의 시조죠. 우리학교의 교양과목 교재에도 실려 있어요.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 그러나 무엇에 취한다? 술이든, 시든, 덕이든, 그 어느 것이든 당신 마음대로. 그러나 어쨌든 취하라. (...)" 19세기 중반 산업화 시대, 정신적 방황 속에서 이상향을 꿈꾸었던 ‘저주받은 시인’ 보들레르의 구원 방책이었죠. 보들레르는 술에만 취하는 게 아니라 시에도, 미덕에도 취하라고 해요. 내적 균형을 맞추자는 거죠. 그런데 ‘취하라’고 독백했던 장그래에게 ‘취하지 않기’라는 전혀 다른 균형추가 제시돼요. 장그래는 계약직임에도 불구하고 '판을 뒤흔드는' 발상의 전환으로 회사의 보수적 관행을 무시하고 일을 벌려 쾌거를 거두죠. 장그래는 ‘이렇게만 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나?’ 은근히 꿈도 꾸죠. 하지만 장그래가 취해서 허공으로 둥실 떠올라 환상 속에서 헤매지 않게,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끌어내리는 중력의 역할을 하는 인물이 그의 상사 ?오과장?이예요. 장그래가 허망한 꿈에 빠져들까 걱정했거든요. 꿈꾸고도 꿈꾸지 않는 것, 취하고도 취하지 않는 것, 장그래도 알고 있는 삶의 지혜였어요. 조치훈 9단이 했던 말,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을 돼내었던 그였으니까요. 그대는 자기가 하는 일과 노력이 '그래봤자 바둑'이라고 좌절하고 포기할건가요? '그래도 바둑, 내 바둑이니까'라며 꿈꿔보지 않겠어요? 각자 자신의 미덕에 취해보지 않겠느냐 말이에요! 사족 하나. '그래봤자 바둑'이라는 것도 잊지는 말아요. 이 둘의 끊임없는 반복이 우리의 삶일 테니까요.

교수칼럼 | 권은미 교수(불어불문학과) | 2015-03-23 19:32

우리학교 영어 교명은 Ewha Womans University이다. 누가 보더라도 잘못 된 영어 교명 같다. 특히 외국인들은 이화 대학인들의 영어 실력을 의심할 것이다. 그런데 이 영어 교명 자체가 미국인 메리 스크랜튼 (Mary F. Scranton) 여사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 좀 이상하지 않는가? 그러나 100 여 년 전에 이 영어 교명을 지은 데는 깊은 뜻이 있었다고 한다. 나는 1968년에 초등교육과에 입학하여 이제 이번 학기면 은퇴를 한다. 무려 반세기 가까이 이화 교정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방학이면 외국을 나가 지내면서 우리학교 영어 교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우리 학교 설립자들의 혜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Womans’란 단수에 복수를 합친 말이다. 이것의 의미는 이화인은 개인이면서 전체이어야 한다는 말로 해석된다. 나무를 보면서 동시에 숲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로 풀이해 본다. ‘우리’라는 말 그대로 우리는 개인과 가정, 가정과 사회, 개인과 국가를 구별하지 않았었다. ‘우리 어머니’와 심지어는 ‘우리 안해’와 같이 말이다. 그런데 어쩌다 지금 우리는 너무도 개인주의에 함몰 되고 말았다. 그래서 사물을 볼 때에도 개인과 부분은 볼 줄 알아도 집단과 전체를 볼 줄 모르게 되었다. 인간과 모든 생명 있는 것의 생존 전략은 부분과 전체를 동시에 볼 줄 알아야 한다. 나무와 숲을 동시에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새들을 보라. 높이 떠 보는 것을 조감도鳥瞰圖라고 한다. 새는 먹이감을 높이 하늘 위로 떠 볼 줄도 알아야 하고, 먹이감이 있는 부분을 동시에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부분이라는 ‘대상’에 대하여 그것을 초월하여 조감도 차원에서 보는 것을 ‘메타 meta’라 한다. ‘물리학physics’이 부분으로 보는 것이라면 그것의 전체 모습을 보는 것을 ‘형이상학metaphysics’라 한다. 심지어는 최근에 ‘meta-meta physics’라는 책마저 나왔다. 지금까지의 형이상학을 더 한층 높은 차원에서 본다는 말이다. 심지어는 기독교가 말하는 ‘회개’라는 말의 그리스어는 ‘metanoia’이다. 생각컨대 기독교가 당시의 전통적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혁신 시키지 않았다면 오늘과 같은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전에서 한 번 meta가 접두어로 들어가는 말을 찾아보면 혁신과 변화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Meta Womans가 된다는 것을 실로 혁신과 변화를 일으키는 이화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런 차제에 Ewha Womans를 ‘Meta Womans’로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높이 떠 세계를 조감할 줄도 알고 국지적으로 집착할 줄도 아는 인간 말이다. 부분과 전체를 동시에 보아야하는 가치관적 이유는 더욱 심각하다. 개인 차원에서 보면 선이지만, 사회나 국가 차원에서 보면 악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둘을 동시에 보지 못하도록 엄격히 막아 놓고 있다. 부분과 전체 어느 하나도 선이고 악이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느 한 쪽 만 보는 것이 악이고 불행인 것은 확실하다. global과 local의 합성어 ‘glocalism’을 이화 정신과 조화 시키는 metawomans의 탄생이 바로 2015년 새 봄의 화두이었으면 한다.

교수칼럼 | 이성은 교수(초등교육과) | 2015-03-16 12:06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이대학보의 원고청탁을 받고 학기 말 즈음에는 쓸 수도 있겠다 답한 기억은 나는데, 에잇, 끝내지 못한 일들과 허덕이다 보니 괜히 미룬 것이 후회가 된다. 도대체 왜 이렇게 바쁜 것일까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평가 때문인 듯하다. 장기적인 연구과제에 선정되었다 하더라도 거의 매년 평가를 받아 연구가 중단될 것을 각오하고, 혹은 염두에 두고 프로젝트를 진행시켜야 한다. 이러한 상시적인 불안상태가 연구를 잘 수행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만든 것 같은데, 긴 호흡으로 연구 기획에 맞게 운영하기보다는 중간에 중단되었을 경우의 부담에 맞서기 위해 단기적인 성과를 만들어내는데 집중하는 아쉬움과 자괴감이 만만치 않다. 실제로 연구책임자 업적이 평가에 미치는 비중이 더 커지고 나서는 모든 것을 이 평가 기준에 맞추어 생각하는 버릇이 생겨났다. 일본 공동연구자의 요청으로 등재지도, SSCI도 아닌 일본 학술지에 논문을 싣게 되었을 때에는 -비록 후회는 없었지만- 연구재단의 기준으로는 평가 점수를 전혀 받을 수 없다는 점이 몹시 아쉬웠다. 영국 친구가 에디티드 볼륨의 한 챕터를 공저하자 제안했을 때는 즉시 거절하였다. 전공분야와 거리가 있어 궁극적으로는 거절했겠지만, 조금 더 고민하고 미안해하는 대신 평가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제안을 한 친구한테 심지어 약간 짜증까지 났던 기억이 난다. 유럽의 한 저널에서 세계적인 석학의 주목받는 신작에 대해 리뷰 심포지움을 기획한다며 북 리뷰를 요청했을 때에는 -대학원 때 그토록 좋아하던 학자라 정말 기쁘고 기대되는 작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처 끝내지 못한 내 논문부터 완성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무려 사흘을 고민한 끝에 간신히 참여하겠다는 답신을 보냈다. 북 리뷰도 물론 점수가 되지 않는다. 해외에서 오랜 연구 활동의 경험이 있는 어느 한국인 학자는 우리는 왜 연구를 이것밖에 못했는지를 설명하는 사유서를 제출하느라 바빠 정작 연구할 시간을 갖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모든 제도는 그 사회가 처한 맥락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평가제도가 우리나라에서 정착한 것은 아마도 연구비를 제대로 연구에 사용하지 않은 아주 소수의 연구자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연고에 따른 봐주기를 막고 제대로 된 질적인 평가를 가능케 하는 객관성이 각 분야마다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구조조정과 개혁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대학에 대한 평가기준과 제도도 매우 편파적이거나 근시안 적이며, 그로 인해 많은 대학이 고통 받고 있다. 이 역시 대학은 스스로 평가하고 발전할 능력이 없다는 생각 하에 만들어진 제도일 것이다. 물론 이에 해당하는 소수의 대학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 소수가 저지를 지도 모르는 잘못으로 다수에게 고통을 주는 제도를 이처럼 유지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전면적인 고민과 검토가 물론 필요하겠지만,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살아온 나의 경험은 아마도 그 맥락이 수정되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흘러야 할 것임을 말해준다. 하지만 북 리뷰 사건으로 스스로에게 꽤나 실망한 이후에는 이런 평가제도 하에서 내가 가져야 할 태도와 원칙에 대해 보다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연구는 연구자가 평생 해야 할 부담스럽지만 매우 달콤한 책무이며, 거기에는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을 알아내고 싶다는, 그리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을 조금 더 낫게 만들고 싶다는 단순하고 강렬한 바람 말고는 아무 것도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가능하면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학문 커뮤니티와의 소통을 시도하고 유지하여야 하는 의무를 지켜야 함도 물론이다. 제도는 그대로 있겠지만, 그 제도를 바꾸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사람일 터이니. 그 논문은 아직도 끝내지 못했다. 덕분에 나에 대한 나의 평가는 꽤 좋아졌다.

교수칼럼 | 이주희 교수(사회학과) | 2014-11-24 11:30

영화 [명량]이 관객 1,800만명에 육박하는 대기록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압권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일 것입니다. 풍전등화에 놓인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책임져준 자랑스러운 12척의 배 한척 한척에 이름을 붙여봅니다. 충정의 배, 결기의 배, 인내의 배, 신명의 배, 지조의 배, 자결의 배, 신념의 배, 기개의 배.... 오늘 우리 이화인에게는 어떤 배(ship)가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우리에겐 공감하는 우애의 배, companion-ship이 있습니다. 제러미 리프킨은 인간의 능력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공감을 꼽으면서 인간을 호모 엠파티쿠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각박한 생활 속에서 우리는 우리들끼리의 정서적 교감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경쟁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경쟁 속에서 주위를 돌아보지 못하고 혼자 사는 방법만을 터득하고 있습니다. 공감은 또한 배려입니다. 배려는 타인을 염려하는 마음입니다. 나는 취업했는데, 그럼 내 친구는? 하는 물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으~리”입니다. 우선 나부터 과감히 친구들을 찾아 나서봅시다. 참치김밥 한줄 같이 먹자, 포도길 같이 걷자, ECC동산에서 만나 수다 떨자, 시험공부 같이 하자... 라고. 그러면 우리가 잊고 있던 friend-ship의 배를 다시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겐 치열한 자존의 배, owner-ship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기본에 충실하며 매사 책임질 줄 아는,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할 줄 아는, 있는 모습 그대로 당당히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주인은 우리 자신입니다. “낯설은 산맥 따라 날개 없이 날아온 새, 오히려 잘못 온 길이 새지도를 만든다”는 문복희 시인의 시구처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개척해나가는 열정적인 도전정신을 연마해야 합니다. 좌절을 버텨내어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힘을 길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색의 시간을 가지면서 자신의 이상과 꿈을 펼쳐보는 학창생활을 보내봅시다. 이는 우리를 frontier-ship으로 안내해줄 것입니다. 우리에겐 나누는 리더의 배, leader-ship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 리더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을 밟고 그 위에 올라서는 리더가 아니라 남을 세우고 함께 가는 그런 리더여야 합니다. 논어에 나오는 기욕입이입인(己欲立而立人)의 리더십입니다. 이 리더십은 follower-ship이라는 다른 배 한척을 선물해줍니다. 누군가의 앞에 선다는 것은 누군가의 뒤를 따라간다는 것과 같은 의미임을 가르쳐줍니다. 무조건 경쟁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공감하면서 함께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리더의 자세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다른 사람이 앞서 가는 것 또한 감내해내야 하는 것이 진정한 리더십임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을 성찰하면서 원형의 리더십을 갖춰갑시다. 우리에겐 사고하는 학식의 배, scholar-ship이 있습니다. 우리는 대학의 공간에서 지식과 지혜를 쌓아가고 있습니다. “지렁이가 책 읽는 소리”를 들어봤나요? 연암 박지원은 한낱 미물들의 작은 소리조차 공부하느라 내는 책 읽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겸손히 공부에 전념하라고 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야한다는 이야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겠지만 반복되는 까닭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다시 고전을 뒤적이고 현실을 탐색하다보면 어느덧 자신도 모르게 부쩍 성장한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배를 품고 있나요. 청춘이란 본디 “내꺼 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개연성과 불확실성과 가능성의 상징입니다. 그 청춘의 한가운데 있는 우리 이화인의 배가 궁금합니다.

교수칼럼 | 양옥경 교수(사회복지학과) | 2014-11-17 13:49

규제 하나에 부패(corruption)가 열 개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규제는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부작용이 최소화되도록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어져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가격통제(price control)는 정부가 특수한 목적을 띄고 가격형성에 직접 개입하는 대표적인 규제이다. 정부의 의도가 공급자를 보호하는 것이라면 일정 가격이하로 가격이 내려가지 않도록 가격을 통제하는 것이고 수요자를 보호하고자 한다면 가격이 일정 수준이상 오르지 않도록 인위적으로 규제하는 것이다. 비록 바람직한 의도에서 출발했더라도 시장경제에서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에 정부의 시장 개입은 대부분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 주말 시작된 아이폰 대란은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 지 쉽게 설명해준다. 일부 판매점들이 새로 출시된 아이폰6를 기습적으로 매우 낮은 가격에 판매하면서 그 직전에 제 가격을 다 주고 구매한 소비자들이 우습게 되어버린 것이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이동통신 3사에게 강하게 경고하자 이번에는 제재를 피하기 위해 판매점들이 개통을 취소하고 기기를 회수하느라 또 다른 대란이 진행되고 있다. 한편에서는 비싸게 구입한 소비자들이 판매점에 개통취소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어 가히 점입가경이다. 이러한 난리통 뒤에는 단말기유통구조개선법(단통법)이라는 섣부른 규제가 자리하고 있다. 단통법의 핵심은 이동통신사와 제조사의 보조금 상한 규제이다. 막대한 보조금과 마케팅 비용에 제동을 걸게 되면 휴대폰 요금이 인하하게 되어 통신비 절감으로 이어질 것으로 주장했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시장에서 가격을 낮추는 유일한 방법은 경쟁이다. 강력한 규제나 가격통제가 아주 일시적으로 가격에 영향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나 곧 수많은 편법과 불법을 양산하고 결국은 가격폭등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단통법의 시행으로 마케팅도 줄고 경쟁도 줄고 시장도 위축되어 버렸다. 보조금 규모가 규제대상이 되어버리니 소비자는 비싼 값을 주고 휴대폰을 살 수밖에 없다. 휴대폰대리점은 그나마 경쟁수단이었던 보조금이 30만원으로 묶인 탓에 판매가 거의 10분의 1로 격감했다. 출고가를 조정해야하는 제조사까지도 큰 피해를 입고 있다. 통신비 절감은 고사하고 모든 국민이 통신비 증가를 직면하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부와 국회가 만들어 낸 단통법은 이동통신사들의 과다한 이익을 소비자들의 통신비 절감으로 환원시키려는 의도와는 달리 ‘단지 통신사만을 위한 법’이라는 오명을 쓰게 된 잘못된 규제이다. 한편에서는 규제철폐를 외치고 다른 편에서는 국민 모두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불합리한 규제를 양산하면서도 계속 또 다른 규제로 이 국면을 모면하겠다는 말만 늘어놓고 있는 것은 터무니없다. 통신비 절감은 방송통신위원회가 제조사와 통신사에게 가격과 요금을 당장 내리라고 윽박지른다고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통신사 시장이 더 치열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그 장을 열어주어야만 가격을 낮추고 질 좋은 서비스가 제공될 것이다.

교수칼럼 | 차은영 교수(경제학과) | 2014-11-10 13:42

1992년 2월의 어느 날 나는 뉴욕 맨하탄의 서쪽 끝에 위치한 유엔본부 건물 앞에 서 있었다. 대학을 마치고 지금으로 표현하면 일종의 배낭여행을 떠났던 나는 당시 바로 직전이었던 1991년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 여운이 채 가시기 전 유엔을 한 번 방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세계 모든 나라가 회원국으로 가입하였지만, 분단의 아픔으로 인해 우리는 구소련이 몰락한 다음에야 유엔 가입이 이뤄졌다. 케냐에서 온 자원봉사자로 기억되는 어느 흑인여성의 설명을 들으며 유엔 본부 건물 투어에 참여했었다. 그러다 총회장이 있는 건물의 2층 이었던가 3층 이었던가, 아무튼 어느 복도에서 난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커다란 그림 4점이 내용의 연속성을 보이며 걸려있었는데, 인류가 최초 생겨난 모습, 서로의 이기심 속에 다양한 문화가 성장하는 모습, 그러다 서로 처참하게 다투는 모습이 각 그림 속에 담겨 있었고, 마지막 그림에는 서로 화합하고 타협하는 지혜를 발견하고 평화를 찾아간다는 내용이 그려져 있었다. 난 정확히 22년전 이 그림 4점을 본 순간부터 ‘낯선 세상’과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 ‘썸을 타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내가 경제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무조건 외교학에 대한 동경과 꿈을 품고, 국제정치를 새롭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조금 장황한 설명이었지만, 지금부터 20여년전 당시 내가 낯선 세상과 썸타기로 결심한 그 상황이 바로 오늘 이 순간 이화의 학생들에게 국제정치학을 가르치는 인연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난 그 4점의 그림이 20세기의 거장 피카소의 작품이란 걸 알게 되었고, 이후 다짜고짜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으며, 몹시도 낯설었지만 외교학이란 분야를 새롭게 전공하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지금에서야 얘기지만 피카소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뜻을 전하고 싶다.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 ‘썸탔다’는 말이 유행한다고 한다. 정확한 유래를 알 수는 없지만, 예전에도 “썸씽이 있다”는 말이 누군가와 연애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곤 했으니, 아마도 짐작컨대 우리는 영어의 ‘some’ 혹은 'something'을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좋아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누군가와 '썸타게' 된다면 아마도 대부분 행복하고 야릇한 감정에 빠지게 될 것이고, 그 상대를 더 잘 알고자 노력하게 될 것이며, 또 그 상대를 나의 소유로 만들고자 더 정성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우리가 썸을 타야할 대상이 반드시 사람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건강한 판단력과 이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 대상이 무엇이든 다양한 대상을 상대로 썸을 탈 수 있지 않을까? 이화인 여러분, 세상과 ‘썸타’ 보지 않을래요? 피카소의 그림을 본 순간 내가 국제사회의 수많은 낯선 외교 사건들과 ‘썸타’ 보리라 마음먹었던 것처럼, 여러분들께도 새로운 세계 그리고 미지의 세계와 썸타 보라고 권해보고 싶다. 자주 해외에 나가는 편이지만, 정말 외국을 방문하는 매 순간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던 어느 기업인의 말이 절로 떠오른다. 우리는 자원이라고는 사람밖에 없는 대한민국에 태어났다. 이제는 이화 캠퍼스 안에도 외국인 유학생이 많아서, 이런 식의 표현이 다소 근대성에 매몰된 발언일 수 있겠지만, 어쨌든 부지런히 움직이며 우리 바깥 세상의 다양한 대상을 상대로 ‘썸’을 타야만 더 잘 살고 또 더 자유로울 수 있다. 여성은 특히 새로운 문명과 지식을 받아들이는 데 더욱 적극적이고 개방적이라고 한다. 우리 이화인의 DNA에는 누구도 따르지 못할 세상에서 가장 글로벌 지향적인 유전자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불행히도 이제는 피카소의 그 작품이 더 이상 전시되어 있지 않다. 어떤 이는 뉴욕메트로폴리탄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하는데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원래 ‘썸탄’ 대상은 나에게 성숙을 안겨주고 홀연히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도 유쾌하게 웃으며 하루를 시작해 본다.

교수칼럼 | 박인휘 교수(국제학부) | 2014-10-06 10:02

스탠포드 대학의 사회 심리학자인 드웩 교수는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습 성취도와 관련된 실험을 하였는데 그 실험결과가 너무 흥미롭다. 실험의 내용은.. “초등학생들에게 아주 쉬운 시험문제를 주고 풀게 한 후 절반의 학생들에게는 ‘너는 참 똑똑 하구나’ 라고 지능에 대해 칭찬을 하였고, 나머지 절반의 학생들에게는 ‘너는 참 애 썼구나’ 라고 노력에 대해 칭찬을 해주었다. 이후 학생들에게 어려운 시험 문제지와 쉬운 문제지를 주고 선택을 하게 하였는데, ‘지능’을 칭찬 받은 학생들은 쉬운 문제를 골랐고, ‘노력’을 칭찬 받은 학생들은 어려운 문제를 골랐다. 세 번째 시험에서는 학생들에게 매우 어려운 문제의 시험지를 풀게 하였는데 ’지능‘을 칭찬 받은 학생들은 매우 낙담하면서 아예 문제를 풀려고 하지 않았고, ‘노력’을 칭찬 받은 학생들은 문제를 풀려고 노력하였고 몇몇 학생들은 문제를 풀기까지 하였다. 네 번째 시험에서는 학생들에게 처음과 같이 쉬운 문제를 풀게 하였는데 ‘노력’을 칭찬 받은 학생들의 성적이 ‘지능’을 칭찬 받은 학생들에 비해 성적이 훨씬 더 크게 향상되었다. 이러한 실험결과는 여러 학생들을 대상으로 6번 반복되었고 같은 결과를 보였다,” 이러한 실험결과에 대해 드웩 교수는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은 자신이 똑똑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미리 위험을 회피한다고 설명한다. 즉 자신이 멍청해 보이지 않도록 늘 쉬운 것 만 찾고, 도전정신을 망각하면서, 오히려 실력이 저하 된다는 것이다. 이번 실험이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되었지만 대학생들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할 때는 큰 꿈과 목표를 가지고 있다. 특히 공무원이 되겠다거나, 기자, PD, 교육자 등 우리 사회에서 전문직으로 손꼽히는 직종에 취업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대학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곧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열심히 했는데 A 학점을 못 받거나, 원하던 직종의 인턴 시험에 떨어지거나, 토익성적이 높게 나오지 않고나 심지어는 동아리 면접에 떨어져 본 학생들도 있다. 이들은 시험에 떨어지거나, 점수가 낮게 나온 것이 ‘자신이 멍청하다’고 보일까봐 이후에는 거의 도전을 하지 않고, 자신의 꿈이나 목표를 변경한다. 실제 학교에서 개최하는 취업 특강을 듣고 도전의식을 고취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선배들의 어려운 취업 성공기와 업무 내용을 듣고 아예 도전을 접는 학생들도 많이 있다. 미리 위험을 회피하고 보다 안전한 길을 택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목표를 변경한 학생들이 자신이 변경한 목표를 이루거나, 그 목표에 대해 만족하는 학생들을 많이 보지 못했다. 몇 번을 도전해서 성공한 학생들이나 혹은 몇 번을 도전하고 실패해서 그때 다른 목표로 변경한 학생들이 더 만족하고 자신의 목표와 꿈에 근접한 삶을 살아간다. 성공은 노력의 결과이지만 실패도 노력의 결과다. 나는 입사 시험에 떨어진 학생들의 노력과 도전을 칭찬해주고 싶다. 한번, 두 번, 세 번 실패해도 그 노력은 쌓이고 경쟁력이 된다. 이후 살아가면서 더 큰 어려움이 닥쳐도 헤쳐 나갈 수 있게 해준다. 젊었을 때의 도전과 실패는 칭찬받을 일이다. 미리 어려운 길을 회피하고 쉬운 길을 택하지 마라. 노력을 했으나 A 학점을 못 받은 학생들, 인턴 시험에 실패한 학생들, 토익 성적이 낮게 나온 학생들, 자신이 원했던 동아리에 못 간 학생들, “ 모두 애 썼어요, 남은 대학생활 파이팅!!!” 하세요.

교수칼럼 | 유세경 교수(언론홍보영상학부) | 2014-09-29 09:27

우리는 오래전부터 누군가에 의해서 은연중 이미 성공한 사람들의 정형화된 꿈을 복제해가며 살도록 강요당해왔다. 어느 순간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들의 몇몇 성공 스토리는 젊은이들의 꿈을 대량생산해주는 제조공장으로 전락했다. 부모들도 자녀들이 스스로 만든 꿈이 아니라 이미 성공한 사람들의 안전한 꿈을 벤치마킹하고 복제해가며 살도록 부추기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한국사회에서 웬만큼 산다는 부모들은 자식의 재능과 열정이야 어떻든지 자신의 자식이 의사, 변호사, 판사, 공무원 등의 전문직이 아닌 직업을 넘보는 사는 것을 그냥 자유롭게 놔둘 수 있는 부모는 많지 않다. 이처럼 누구에 의해서 강요되고 복제된 획일화된 꿈으로부터 나의 꿈을 해방시켜 나만의 꿈을 꾸는 것을 꿈의 민주화라고 부른다. 한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꿈을 만들어 사회라는 플랫폼에서 이것을 구현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때 또한 사회는 이런 노력을 적극 지원해주는 시스템을 구축했을 때 다양한 꿈들이 어우러져서 공진화하는 건강한 행복의 생태계가 형성된다. 원래 우리에게 인생의 결승점은 각자의 머릿수만큼 존재해 왔다. 하지만 인생을 먼저 산 소위 성공한 사람들이 자신이 도달한 종착역만이 진정한 종착역이라고 주장해가며 기득권을 주장하고 이 기득권을 자신의 자식들에게 까지 대물림하기 시작하면서 자신만의 종착역을 소리치던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져갔다. 사람들이 몇 개로 한정된 똑 같은 종착역을 놓고 무한경쟁하기 시작하면서 시기, 질투가 생겨났고 인류의 비극도 시작되었다. 인생의 종착역은 하나라는 주장이 기득권을 성취한 사람들의 음모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지내는 순간 이미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고착시키기 위한 시스템인 계층을 만들어냈다. 계층에 편입된 순간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꿈을 버리고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이 계층에 편입해 들어가면 갈수록 많은 사람들은 기득권이 설정해 놓은 같은 결승점을 향해서 서로 아웅다웅 경쟁하고 서로 시기하고 서로 질투하는 것을 인생의 참모습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기득권이 강요한 삶이 고착화 되면 될수록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행복은 점점 꺼져가는 불꽃이 된다. 이미 기득권을 성취한 사람들은 이런 우리끼리의 경쟁을 은밀히 지켜보며 자신들이 만들어 논 계층 질서가 영구히 무너지지 않도록 매일매일 기도할 것이다. 우리 인간은 태초부터 누구도 자신의 종착역만이 진정한 종착역이라고 타인에게 강요할 권리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인간은 누구라도 인간으로써 자신만의 삶의 종착역을 주장할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 우리가 주장하는 진정한 평등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신에게 맞는 꿈을 찾아 날개를 펼 수 있는 다양한 기회의 평등인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며 다양한 꿈을 꿀 때 세상의 다양한 일자리는 다시 만들어지고 공동체에 기반을 둔 행복도 다시 복원될 것이다. 결국 행복의 복원은 개개인들이 다양한 종착역에 대한 믿음을 복원하여 이를 향해 꿈을 민주화 시키는 데에서 시작된다. 꿈을 제대로 민주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 이 일을 성공함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의 성공을 크게 도울 수 있는 것의 세 영역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자신만의 일을 찾아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세 영역이 만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없어서 결국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남들의 성공을 크게 도와 줄 수 있는 일은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다. 결국 나머지 둘 중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먼저 선정하라고 충고하고 싶다. 세상은 너무 복잡해져서 예체능의 일이 아니라면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만 가지고 성공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고 있다. 오히려 좀 모자라는 재능은 학습욕구를 불태워 그 영역에서 오히려 재능을 가진 사람들보다 큰 성취를 이뤄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왠만한 재능을 대치해줄 수 있도록 기술이 고도로 진화한 현대사회에서는 노력이 가장 큰 재능이다. 또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은 자신의 가슴을 오랫동안 뛰게 해서 자신에게 무한한 공짜 에너지를 제공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만들어 준 꿈의 노예로 사는 삶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가슴이 시키는 대로 자신의 열정을 따라 자신만의 종착역에 대한 믿음을 복원하고 이를 향한 꿈을 되찾는 순간 떠났던 행복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교수칼럼 | 윤정구 교수(경영학과) | 2014-09-15 21:55

인간은 시간이라는 단위를 만들어 새롭게 시작하는 단위에 ‘새 해, 새 달, 새 날’같이 ‘새’를 붙이고, 새로운 의식이나 다짐의 출발점으로 삼기도 한다. 2014년 9월이라는 것도 흘러가는 시간의 한 과정이지만, 우리는 새 학기의 시작으로 받아들이고, 특히 우리 이화여대의 경우에는 새로운 총장이 새로운 비전으로 새로운 이화를 만들기 위해 새롭게 노력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새 학기라는 표현을 하면서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물려 준 문화 유산을 생각하면서 새로운 다짐과 각오를 한 번 해 보기를 바란다. 문화 유산은 필자의 전공에 맞추어 우리 조상의 문자 생활에서 찾아 보기로 한다. 고유한 문자를 가지지 못했던(혹은 가졌다 하더라도 없어져 버린) 한국인의 조상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내지 2,500년 전쯤에, 인접해 있는 종족의 문자인 한자를 수용하여 우리말을 표기하게 된다. 그런데, 한국어와 중국어는 음운·형태·통사에 있어서 큰 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국어를 표기하기에는 부적절한 면이 많아 우리의 조상들은 한자로써 우리말을 표기하기 위해 새로운 용법을 만들어 변용하게 된다. 단어문자인 한자를 빌어와 음절문자식으로 변용하여 표기하기도 하였고(예: ‘都, 古’ 등은 각각 우리말의 ‘도, 고’ 등을 표기하기 위해 사용), 이에서 더 나아가 음소문자식으로 변용하여 표기하였다.(예: ‘ㅅ, ㅁ, ㅂ, ㄴ’ 등을 표기하기 위해 ‘叱, 音, 邑, 隱’ 등을 사용) 이러한 과정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첫째, 고유의 것이 없을 경우에는 차용(수용)하되, 한국적인 실정에 맞게 변용하라. 15세기 동방의 조그만 나라였던 조선에서는 인류의 문자사를 새로이 하는 대단한 창조가 일어나는데 그것은 바로 훈민정음의 창제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게 되는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가장 큰 동기는 한자에 의한 문자 생활의 불편이었을 것이다. 인류의 문자사를 새롭게 한 이 창조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둘째, 수용과 변용이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에는 스스로 창조하라.한글에 의한 표기 방법에 대한 논의는 1824년 유희 선생이 에서 시작되는데, 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개화기와 일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때에는 표기법의 혁신을 주장하는 일련의 학자들과 기존의 표기 방법을 고수하려는 학자들이 수십년에 걸쳐 대토론의 거치게 된다. 이 과정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셋째, 실질적인 운용에서는 그것의 기능을 고려하여 혁신하되 충분한 토론을 거쳐라.몇 십년간의 토론 끝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만들어지는데, 이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원리는, 훈민정음 창제 후 「한글맞춤법 통일안」이 만들어지기까지 몇 백년 동안 사용되던 표기의 원리를 전면적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 원리는 “한글맞춤법은 표준말을 그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중 ‘어법에 맞도록 한다’는 것은 공시적인 음운규칙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형태음소적 표기를 하고, 공시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은 음소적 표기를 함으로써, 언어 속에 내재되어 있는 규칙과 언어를 표기하는 문자의 표기방법을 조화시키는 것이다. 이 원리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넷째, 실재체의 조화를 꾀하되, 상반된 원리의 균형을 항상 생각하라.외부의 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되 우리의 실정에 맞게 수정하여 수용하고, 외부의 것으로 만족할 수 없을 경우에는 새롭게 창조하고, 과거의 관용에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혁신하되 충분한 토의를 거치고,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조화와 균형이 되도록 하라. 이것이 문자생활을 통해서 우리 조상들이 우리들에게 물려진 문화 유산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이 학기에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한 번 되새기고 가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교수칼럼 | 박창원 교수(국어국문학과) | 2014-09-01 1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