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횡단열차 내부에서 바라 본 석양 
시베리아 횡단열차 내부에서 바라 본 석양 

2학기 복학을 앞둔 여름방학,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다. 지난 6개월 동안 인턴으로 첫 회사생활을 경험한 뒤였다. 

혹여 이 글을 직장인들이 읽게 된다면 경악을 금치 못하겠지만 회사 생활은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15년 학생 꼬리표를 떼고 처음으로 접해본 세상. 쫄쫄이 바지를 입고 잉여계단에서 낮잠을 자던 지질한 대학생에서 정장을 입고 사원증을 맨 채 화려한 사옥을 드나든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세련된 사무실, 동기, 팀원, 상사, 문화 그리고 업무까지. 짜릿하다!

이런 감정은 정확히 한 달을 넘지 못했다. 새로운 것들은 금세 일상이 됐고 당연하면서도 지루한 것으로 변해버렸다. 매일 똑같이 쳇바퀴처럼 순식간에 흘러가버리는 것이 두려웠다. 이러다가 정말 취업을 하게 된다면 도망갈 구석도 없이 평생 이렇게 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단 도망갈 구석이 있는 지금 러시아로 훌쩍 떠나버린 것이었다.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9288km를 가로지르는 7일간, 매 순간이 축제 같기를 기대하면서. 

최소 1분부터 최대 2시간까지 역에 정차하는 열차
최소 1분부터 최대 2시간까지 역에 정차하는 열차

예상은 틀렸다. 횡단열차는 상상 이상으로 따분했다. 승객들의 하루는 놀라울 만큼 규칙적이었다. 아침에 동이 틀 때쯤이면 하나둘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나 감자 퓨레와 도시락 라면에 물을 넣고 사과를 베어 문다. 그러고 나면 화장실을 이용하려는 사람들로 화장실 앞은 북적이고 이들은 무표정으로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어차피 넘쳐나는 것이 시간이니 조급해 할 필요가 없다는 듯. 점심이 되기 전까지 아이들은 시끄럽게 뛰어 놀고 어른들은 상념에 빠져있거나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 러시아어라서 알아들을 순 없지만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다지 재미있는 대화는 아니었을 것이다. 

끼니때가 되면 또 다시 음식에 물을 붓고 너나할 것 없이 점심을 먹고 화장실을 가고, 책을 읽고, 낮잠을 자고,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에도 다를 건 없다. 비슷한 시간에 해가 지고 사람들은 석양을 보며 식사를 한다. 놀랍게도 또 감자 퓨레나 도시락 라면이다. 지겹지도 않나보다. 저녁을 먹고 나서 이것저것 하다보면 기차에서는 ‘이제 잘 시간입니다’라고 알려주듯 불 하나를 끈다. 더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소등을 한다. 그렇게 하나둘 잠에 든다.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은 고요한 기차 안을 서성이다 떠오르는 해를 맞는다. 

하지만 또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일이 똑같았던 건 아니다. 일면식 없는 사람들과 예상치 못한 대화를 나누거나, 자려는데 발치에 앉아 있으려 하는 무례한 옆 칸 아저씨에게 ‘불편하다’고 화를 낼 일도 생긴다. 어느 날은 기차에 상주하는 경찰이 우리 칸에 들이닥쳤다. 다른 승객들과 실랑이를 하고 술을 먹다 게워낸 아저씨를 잡아가기 위해서였다(훈방조치로 풀려났다고 한다). 한번은 늘 새초롬하던 옆 침대 아기가 다가오기도 하고, 옆 칸에 우르르 탄 아이들이 나를 너무 좋아하는 바람에 이제껏 해본 적 없는 까꿍 놀이를 종일 해주던 때도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의외의 인연들도 만난다. 영어 한 마디 통하지 않던 열차 안에서 “Do you speak English?”라며 다가온 헝가리 사람들과 소등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내 또래의 러시아 여자애가 기차에 탔을 땐 러시아어 알파벳을 배우고, 교양 수업에서 어설프게 습득한 러시아어 발음을 교정 받는 그런 일도 있었다. 

결국 열차에서의 생활은 예측 가능한 일상 속 예측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인 것이 보통의 하루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일주일 내내 새롭고 즐겁기를 바라며 도피하듯 열차에 오른 내 선택은 틀렸다. 열차는 그저 내 일상의, 크게 보자면 내 삶의 축약판이었다. 너무나 거대해서 가시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삶’이라는 것을 일종의 미니어처처럼 축약해 보는 데 그 의의가 있을 뿐이었다. 매일이 축제 같기를 바라는 건 말도 안 될 뿐더러, 때론 지겹기까지 한 반복적인 일상이 빼곡히 쌓여 삶을 이룬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도. 삶의 베이스는 지루함이고 행복, 즐거움, 짜릿함 등이 때때로 찾아올 뿐이라는 것. 그러니 되풀이되는 일상이 따분하다고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 그걸 열차를 타며 알게 됐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이 횡단열차처럼 지루하고 길 것이다. 그런데 또 길고 긴 시간을 무상하게 흘려보내다 보면 벌써 종점인가 싶어 황급히 뒤를 돌아보게 될 지도 모른다. 아마 기차를 타지 않았다면 지금껏 골이 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차를 탄 이상, 그 지루함도 여행의 일부였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삶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될 수밖에 없다. 시베리아 철도여행이 준 의외의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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