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4호 시베리아 철도여행기에서 이어집니다.

 

열차 안에서 만난 사람들과 정차역에서 내려 먹을 것을 사고 산책을 하곤 했다.
열차 안에서 만난 사람들과 정차역에서 내려 먹을 것을 사고 산책을 하곤 했다.

파마를 하고 안경을 쓴 서글서글한 헝가리 여자가 서툰 영어로 “Do you speak English?”라며 우리 칸에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을 땐 구세주라도 만난 기분이었다. 이 칸에 러시아어가 아닌 영어로 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니! 게다가 헝가리 여자가 네 침대 위에 있던 냄새나는 남자들 드디어 내렸구나라고 말했을 땐 난 이미 그녀와 진한 우정을 쌓아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우정이라니. 이 얄팍한 인연을. 사실 그렇지 않나. 기차 속 인연은 짧게는 하루, 길게는 6일 동안 지속되니까. 기차 안에서는 서로의 신상과 취향을 파악할 만큼 긴 시간이지만 기차 밖 시간으로는 사실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다. 게다가 우리는 곧바로 각자의 고향인 서울, 부다페스트, 노보시비르스크로 돌아가 각자의 삶을 살며 서로를 까마득하게 잊게 될 것이 분명했다.

열차 안에서는 사람들과 엽서, 잡지, 과자 등을 선물로 주고 받는다.
열차 안에서는 사람들과 엽서, 잡지, 과자 등을 선물로 주고 받는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대한 판타지가 허무맹랑하다는 것은 쉽게 깨닫는 반면 우정 판타지는 쉬이 손에서 놓지 못한다. 정말 그 판타지가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믿지 못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우정은 절대성과 진정성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대학에 와서 친구라는 개념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겠는가. 글을 쓰는 지금도 살짝 눈물이 맺힌다.

 

일단 내게 있어 친구의 기준은 많이 볼 수 있고 오래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음악감상 취향은 나와 비슷해야 하며 가벼운 인간관계는 지양해야 하고 서로에게 있어 ‘one and only’가 되어야 한다. 내 고민을 본인의 고민처럼 들어주어야 하고, 약속을 잡을 때는 서로가 1순위가 되어야 하는. 성인이 되어 이 기준을 만족하는 친구를 찾을 수 있기는 할까. 필연적으로 찾을 수 없었고 이 기준에 미달하는 사람들은 어느새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잘라내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기차 밖 세상에서 만났더라면 우리는 친구가 되지 못했을 거다. 나이가 다르고 국적이 다르고 인종이 다르니까. 뭐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에 있었더라도 빡빡한 친구의 기준을 적용했다면 취향이 달라서, 좋아하는 스타일의 인간이 아니라서, 성격이 안 맞아서 온갖 이유를 들먹이며 친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동안 흘려보냈던 수많은 인연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기차 안에서는 그렇게 많은 걸 따지지 않게 된다. 같은 칸 침대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직전 역에서 내린 아저씨와 달리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러시아어로 가득한 기차 안에서 영어를 조금이라도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서로에게 관심을 가진다. 함께 밥을 먹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기차가 큰 역에서 멈추면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또 올라탄다.
기차가 큰 역에서 멈추면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또 올라탄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차 안에서 그랬던 것처럼 조금 이완된 태도로 친구를 사귀어야겠다.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마음의 벽을 세운 채 허락된 사람에게만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었지만, 사실 그 기준이 좋은 관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기차에서 친구가 되는 것처럼 친구를 사귀어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내 편협함에 사로잡혀 보지 못했던 시야 밖의 훌륭한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어쩌면 쉽게 친해졌기 때문에 쉽게 멀어진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렵게 친해졌다고 해서 쉽게 멀어지지 않는 것도 아니지 않던가. 그렇게 완고한 나의 진정한 친구판타지는 무너졌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간이역에서 30분 간 정차한 적이 있었다. 바람을 쐬기 위해 기차 밖으로 나가니 열차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눴던 그들 역시 나와서 스트레칭을 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철도를 건너 정차 역 맞은편에 있던 슈퍼마켓에 갔다. 말이 슈퍼마켓이지 구멍가게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허름한 가게였다. 그 가게에서 수상하게 생긴 빵을 보며 서로 네가 먹어보라며 장난을 치고 깔깔대며 나오는 순간, 눈앞에 아름다운 석양이 지평선 너머로 펼쳐져 있었다. 그 때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건 그들밖에 없다. 그 정도면 서로를 친구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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