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하게 보냈던 2년 반 학보사 기자 생활을 마무리 지은 지 한 달 만에 교환학생이라는 새로운 꼬리표를 달고 출국했다. 지원을 마음먹은 시기는 ‘이제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눈 감으면 절로 들던 학보사 생활 2년 차. 당시 일에 치여 불면증까지 앓고 있던 내 눈에 교환학생 모집공고는 탈출구였다.
그 결과 핀란드가 살아보고 싶던 나라에서 살아갈 나라가 됐다. 배정받은 유바스큘라 대학(University of Jyvaskyla)은 헬싱키에서 버스로 4시간 정도 북쪽으로 올라가야 나오는 도시 이위베스퀼레(Jyvaskyla) 정 중앙에 있다.
핀란드에 도착해 처음 경험한 겨울 삼대장은 냉동실 평균온도를 항상 유지하는 추위, 그치지 않는 눈, 오후 4시면 자취를 감추는 해. 하지만 정작 익숙해지기 어려운 건 날씨가 아니라 수업마다 쏟아지는 과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곧 빈털터리가 될 게 분명한 물가, 한국과 공통점을 찾아내기 힘든 생소한 문화였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하나하나 적응해 가니 어느덧 교환학생 생활 2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격주 연재될 이 칼럼에서는 그간 겪었던 혹은 앞으로 겪을 핀란드 교환학생 생활기를 솔직하게, 수다 떨듯 적어보고자 한다.
오리엔테이션 첫날이자 핀란드 생활 이틀 차였던 지난 3일, 첫 공식 일정을 위해 해도 아직 안 뜬 오전8시30분 기숙사를 나섰다. 털 바지 두 장을 겹쳐 입어도 찬기가 느껴지는 날씨를 뚫고 오리엔테이션 진행 장소인 아고라(Agora) 빌딩 앞에 도착하니, 마찬가지로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중무장을 한 교환학생들이 가득했다.
오리엔테이션은 전반적으로 포탈 로그인 방법, 프린트 사용 방법, 도서관 이용 안내 등 한국에서의 생활과 비슷한 내용 설명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수업 수강 관련 내용은 한국과 판이했다. 그중 귀에 박힌 내용은 ‘수강 신청 가능학점 무제한, 수업마다 시작과 끝 상이, 기말고사 전까지 수강 취소 가능’ 세 가지다.
수강 신청 제한 학점이 없으면 강의 개수를 정말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는 건가? 그런데 권고 학점은 왜 있는 거지? 수강 신청 날짜가 다르면 시간표는? 정말 언제든 취소 가능한 건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해본 자유로움에 머리가 물음표로 가득 채워졌지만 바로 그 주 주말, 직접 해보며 강제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핀란드는 한국처럼 초까지 완벽하게 맞춰가며 수강 신청 할 필요가 없다. 이화에서 교환학생을 했던 재학생에게 “그래도 시작 날에 바로 신청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그는 “한국에 있을 때 수강 신청 기간에 초까지 보이는 시계를 켜두고 긴장하며 대기하다 시작한 지 5초 만에 수강 신청을 끝냈던 게 기억난다. 여기서는 그러지 않아도 듣고 싶은 수업을 다 들을 수 있을 테니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웃으며 핀란드 사람들은 그렇게 부지런하지 않다는 농담을 덧붙였다.
개강 둘째 주까지는 잘 굴러갔다. 첫 주에는 수업이 겨우 두 개라 매시간 과제도 전부 해갔고, 수업 사전 자료인 20장짜리 논문도 꼼꼼히 읽어갔다. 하지만 수업이 한 개, 두 개 더해질 때마다 점점 자는 시간이 늦어졌고, 결국 줄줄이 밀려 해야 할 숙제들은 덩치만 계속 불어났다. 수강 신청한 지 한 달하고 이주 만에 수업 2개를 포기했다. 기말고사 전까지는 자유롭게 신청 취소할 수 있어서 가능한 선택이었다. 초반엔 ‘내가 골랐으니 다 들을 거고, 이 중에 골라서 한국에 가져갈 거라 절대 취소 안 해’라며 오기를 부렸지만 그러다간 정말 하나도 못 가져갈 거 같아 어쩔 수 없었다.
“자유를 주는 대신, 자신의 공부는 본인 책임입니다.” 모든 강사가 수업마다 강조하는 말이다. 수업을 듣기로 선택한 것도, 그 수업을 취소하는 것도,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과의 책임 또한 전부 본인의 몫이다. 성인이 된 지는 한참이지만 이곳에 와 전적으로 개인에게 맡겨진 책임의 무게에 대한 감을 잡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