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상황이 많이 진정되고 엔데믹을 운운하는 시점, 한동안 미뤄 두었던 인사동 고서점을 방문하였다. 온 세상이 신종 바이러스와 씨름하는 동안 고서들은 제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던 듯… 고서가 뿜어내는 꿉꿉하지만 은은한 옛것의 냄새가 반가움, 설레임 등과 섞여 뭔지 모를 미묘한 감정으로 다가왔다. 새로 들어온 고서들을 이리저리 구경하다가 5-60년대 여성백과사전을 발견하고는 착한 가격에 챙겨 나왔다. 고서점을 나와 종로통으로 향한 나는 신촌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대신 길을 건너 동대문 쪽으로 발길을 돌려보기로 했다. 동묘,
소비는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제한된 소득으로 가장 큰 만족을 얻기 위한 경제적 행위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소비는 욕망과 취향, 나아가 문화자본의 획득을 둘러싼 투쟁으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가로지르며 한 사회의 문화적 가치나 권력구조 등이 반영된 사회문화적 행위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젠더와 소비 이슈가 첨예하게 얽혀 있는 것도 이를 잘 보여준다.역사적으로 여성은 생산영역에서 배제되어 온 만큼이나 소비영역에서도 왜곡된 시선에 시달려 왔다. 1990년 중반 처음 등장한 ‘된장녀’는 이후 ‘신상녀’, ‘명품녀’, ‘귀
2020년 3월 이후 2년 만에 사회적 거리두기가 전면 해제되었다. 언론에서는 ‘일상으로의 회귀’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쏟아내고 있지만, 문득 우리의 일상이 과연 2020년 이전의 그것과 동일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코로나 이후의 일상은 그 이전의 일상과는 분명히 다른 모습을 띠고 있을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봄날의 꽃잎이 흩날리는 대학 캠퍼스를 오가는 학생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흔적을 까맣게 잊게 만든다. ‘청춘’이라는 단어는 어느 시기에나, 어떤 상황에서도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그런데 과연 당사자인 청
영화 모가디슈에서의 깻잎반찬과 온라인상의 깻잎논쟁. 공감의 힘과 깻잎 떼어주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아하겠지만 이 장면이야말로 공감의 상황이 잘 반영된 사례이다. 영화에서는 마주앉은 상대방이 깻잎을 떼어내기가 어려운 것을 알고 그 난감한 느낌을 교감한 후 그 상황을 빨리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행동으로 나타난 것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얼마나 난감했을지 상대방과 똑같이 느낄 수 있었기에 그런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영화를 감상하고 있던 우리도 비슷하게 그 감정을 느꼈다. 이것이 공감이다. 반면 깻잎논쟁에서는 공
오랜 기간 드라마 입문 수업에서 비극의 전범인 을 학생들과 함께 읽었지만 테베에 퍼진 전염병은 플롯의 ‘발단’일 뿐 수업의 중심 주제가 되지 못했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의 공포가 극에 달했던 2020년 봄 학기, 작품 초반에 나오는 역병에 대한 생생하고 구체적인 묘사가 문학적 은유가 아닌 체험적 사실로 읽혀지기 시작했다. 소포클레스가 이 극을 집필한 기원전 430년 경 아테네는 전쟁과 역병이라는 이중의 재난 속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인구의 사분의 일의 목숨을 앗아간 역병은 신화 속 사건도, 문학적 상징
코로나는 인류에게 무엇을 말하는가?코로나 펜데믹이라는 커다란 재앙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허약한가, 새삼 되묻게 된다.오직 인간 본위의 사고방식과 문명이 우주에 대한 이해를 제한해 온 것은 아닌지, 지금이야 말로 인류문명 전부를 고민하고 성찰해야 될 때라는 생각이 든다.코비드-19로 우리 몸은 쇠약해지고 이화동산도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몸이건 공간이건, 너무 혹사해도 안 되지만 너무 안 써도 생기를 잃게 된다. 결국 몸의 문제이다. ‘몸’이란 지성, 감성, 감정, 영혼이 스며 있는 삶 그 자체이다. 세상은 큰 몸이고 우리 몸은 작은
“교수님, 그렇게 하면 손해 보는 것 아니에요?”매 학기 꼭 한 번씩은 듣게 되는 질문이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발생할 수 있는 분쟁과 관련된 기초적인 법률 지식을 전달하고 적절한 해결 방안을 함께 고민하는 교과목을 운영하면서, 학생들이 법률적인 대응만을 정답으로 생각하는 모습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예를 들어, 지난 1년 이상의 기간 동안 코로나 상황으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많은 학생들이 층간소음을 일상생활에서 자주 경험하는 분쟁으로 언급하고 있다. 층간소음 문제로 고통 받고 있는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바람직한 해결 방안
바야흐로 ‘대한민국 콘텐츠의 황금광 시대’이다. 대중음악에서는 BTS, 드라마에서는 , 영화에서는 등 한국 콘텐츠가 전 세계 평론가의 호평과 대중의 사랑을 동시에 받고 있다. 혹자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단군 이래 한국 문화 최대의 호황기’라고 평하지만, 본래 우리는 구비 문학의 시대부터 디지털 문화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늘 콘텐츠와 놀이 문화에 진심인 편이었다. ‘한판 놀아보자’라는 우리말이 네이버 파파고로는 ‘Let's have fun.’, 구글 번역기로도 ‘Let's play a game.’으로 밖에 번
매일 아침은 아니지만 달걀 삶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일이 많다. 몇 년 전에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학생이 다른 음식은 제대로 먹지 못하는데 유독 내가 삶은 달걀을 먹으면 기운을 차리게 된다는 말을 듣고 일주일에 한 판씩 달걀을 사서 몇 알씩 삶아 전해주기 시작했다. 그 학생은 곧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일자리를 찾아 떠났지만 나는 어느 덧 달걀 삶기의 달인 (?) 경지에 올랐다. 달걀 삶기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는 느낌도 든다. 그렇지만 실제로 달걀을 삶아보면 이 일도 결코
이번 학기도 코로나19 확산세 때문에 대부분 강의가 비대면으로 진행되고 있다. 특히 지난해와 올해 입학한 1, 2학년 학생들은 대학 생활 자체를 비대면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다. 만약 내년에 대면 수업으로 정상 복귀되더라도 오히려 교실 환경에 부적응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3, 4학년이거나 이미 졸업해 취업 준비를 하는 학생들의 경우는 최근 몇 년 사이 급격하게 달라진 취업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불안감이 클 것이다. 대학에 진학하는 목적은 개인마다 다소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된 목적은 졸업 후 사회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탈레반 재집권은 많은 사람에게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다. 지난 20년간 미국은 군사적 개입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정치구조와 군조직을 건설하였는데, 그 긴 시간 동안의 투자와 노력이 모래성처럼 무너졌기 때문이다.카불 정권의 몰락과 함께 사람들의 관심은 왜 이토록 아프가니스탄의 정부가 저항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면서 탈레반 세력에 굴복하게 되었느냐로 쏠리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이 21세기 초반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였던 대테러전쟁과 국가건설nation-building의 무모함이었
아침식사는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식사”로 여겨지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나라 성인은 약 30%가 아침식사를 거른다. 그 이유로는 ‘안 먹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가 가장 많았으며 이어서 ‘시간이 없어서’ 또는 ‘식사 준비가 번거로워서’였다.식습관은 개인의 선택이지만 사회-문화적 배경도 영향을 미쳐 시대에 따라 크게 다르게 나타난다. 아침식사에 대한 기록이 대부분 서구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많이 아쉽지만, 시대별 풍조와 환경에 따라 변화되는 과정이 재미있기에 소개하려 한다.고대 로마시대에는 하루에 세 끼의 식사와 한 번의 간식을 먹었
기독교 대학에서 학생들이 교수에게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미국의 한 기독대학인 Azusa Pacific 대학교에서 학생 대상 설문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설문에서 1위는 학생들은 교수들에게서 삶을 통해 기독신앙의 모범을 보기 원한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교수들이 기독신앙에 대해 강의실에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으로 살아가며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기를 원한다. 또한 학생들도 그러한 삶을 살려 할 때 도움의 손길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다.내가 사범대학에서 25년이 넘게 도덕교육을 가르치면서 예비교사들이 가장 알기를
학생들과 상담을 할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는 “교수님은 진로를 어떻게 선택하셨어요?”다. 학생들이 각 분야에서 자리를 잡은 분들을 만난다면 이런 질문을 하고 싶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을 적어 보려 한다.미생물학 전공자로서 최초의 진로 선택은 ‘대학원 진학이냐 취업이냐’였다. 학부 졸업생으로서 대기업에 사무직으로 취업을 하는 길이 있었는데 이를 위해서는 여러 가지 준비를 부지런히 해야 했다. 요새 말하는 소위 스펙을 쌓아야 했다. 세상 물정 모르던 나는 이런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도 몰랐기 때문에 어
최근 기억에 남는 경험 하나를 이야기하면서 글을 시작해볼까 한다. 오랜만에 아무 일을 안 해도 되는 일요일이 생겨서 아이들에게 권해줄 만한 영화가 있는지 물어봤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추천받았는데 ‘날씨의 아이’라는 작품이었다.찾아보니 ‘초속 3센티미터’, ‘언어의 정원’ 등 오래전에 인상적으로 보았던 작품을 만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이어서 주저 없이 얼른 다운을 받았다. 다운을 기다리는 동안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전 작품에서 받았던 인상과 달라진 작가관이나 세계관을 만나면 어떡해야 하나 걱정도 됐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경기도의 한 양계장에서 실제 일어난 일이다. 사료 값이 폭등하자 닭에게 하루 세 번 주던 모이를 한 번으로 줄였다고 한다. 그러자 배가 고파진 2만 마리의 닭이 서로 싸우더니 죽은 닭의 내장을 쪼아 먹었다. 배고픔이라는 생존의 위기 앞에 닭 ‘사회’는 순식간에 무너진 것이다.한편 지구상에서 가장 ‘사회적’인 생물은 개미라고 한다. 퓰리처상을 받은 책 『개미들』을 보면, 앞으로의 지구는 사람이 아니라 개미가 지배할 거라는 다소 ‘생뚱맞은’ 주장을 한다. 근거는 개미의 뛰어난 희생정신과 분업능력이다. 실제로 개
소소한 일상을 잃어버린 2020년이다. 새해가 시작되기 전에는 이런저런 계획도, 희망도 많았는데, 막상 마주한 2020년은 허탈하게 지나가는 모습이다. 그리운 얼굴들을 만날 기회도, 화창한 봄과 화려한 가을의 정취를 느낄 여유도 모두 빼앗긴 채, 예고 없이 들이닥친 ‘고립’에 허둥지둥 적응하기 바빴다. 그리고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은 교실에서 학생들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올봄에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수업을 해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전형적인 아날로그 인간인 나는 기계에 대한 막연한 불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은 가까이코로나19와 공존하는 사회에서편견보다는 따뜻한 위로를 지난겨울 코로나19의 소식을 접하고, 어느덧 또다시 겨울을 준비하는 시간이 돌아오고 있다. 2020년은 우리 모두에게 어떤 한 해로 기억될까? 코로나19가 전파되기 시작한다는 소식을 접한 초기에는 새로운 바이러스 유행이지만, “그래 이전처럼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조금만 참으면 이전의 생활로 돌아갈 거야”라는 생각들을 많이 했다. 하지만 이제는 ‘코로나19와 함께 살아가기’라는 주제들에 대해 논하고 있다.초기 대구의 특정 집단에서 많이 발생했던 코
지난 학기 공직에서 돌아오니 코로나19로 온라인 강의가 시작됐다. 꽃피는 아름다운 교정에서 학생들을 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이 컸다. 처음 해보는 온라인 강의지만 지식만 전달하려 하지 않고 캠퍼스 풍경과 내 마음을 전달하려 많이 노력했다. 많은 사람의 우려와 달리, 디지털 네이티브인 학생들은 온라인 강의를 차분히 받아들였다. 온라인에서 이뤄진 여러 상호작용을 통해 나는 오히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학생들과 아주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화에서 보낸 시간이 길어질수록 학생들에 대한 대견한 마음이 커지는데, 이번 학기에는 내가
초록이 눈부시게 빛나던 이화 동산의 5월은 어느덧 계절의 마지막을 향해 무심하게 흘러 가고 있다. 그리고 코로나19 사태로 온라인 강의가 진행되면서 학생들을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과 잘 견뎌내기를 바라는 걱정도 쌓여가고 있다.매일 습관적으로 질병관리본부에서 발표하는 코로나 확진자 수를 확인하고 서서히 바뀐 일상에 적응해 가고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예측했던 미래의 현실과 그동안 묻혀 왔던 우리 사회의 무책임한 민낯이 드러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절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그동안 바쁘게 살아온 시간을 반성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