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상황이 많이 진정되고 엔데믹을 운운하는 시점, 한동안 미뤄 두었던 인사동 고서점을 방문하였다. 온 세상이 신종 바이러스와 씨름하는 동안 고서들은 제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던 듯… 고서가 뿜어내는 꿉꿉하지만 은은한 옛것의 냄새가 반가움, 설레임 등과 섞여 뭔지 모를 미묘한 감정으로 다가왔다. 새로 들어온 고서들을 이리저리 구경하다가 5-60년대 여성백과사전을 발견하고는 착한 가격에 챙겨 나왔다. 고서점을 나와 종로통으로 향한 나는 신촌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대신 길을 건너 동대문 쪽으로 발길을 돌려보기로 했다. 동묘, 신설동 등 오래된 물건들을 만날 수 있는 골목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곳에 간들 딱히 살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왕건이를 건질 거라는 특별한 기대를 하지도 않으면서 차 없이 시내에 나가는 날엔 추억의 물건들을 향한 괜한 객기가 발동하는 것은 왜일까? 허름한 골목의 낡은 물건이 전시된 그곳에는 각양각색의 불상과 용 모양의 조각상, 놋그릇, 나무 제기, 목침, 추억의 LP판, 카메라, 각종 TV와 모니터 등 다른 곳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물건들이 빼곡히 있다. 오래된 물건들을 뒤지는 속에서 뭔가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내 개인의 소박한 바람일 터이다. 하지만 그런 나의 바람은 그저 오래된 물건을 수집하겠다는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동양철학을 전공한 내가 옛것을 대하는 은밀한 제스처이기도 하다.

과거가 단지 흘러가 버린 것이 아니라 기억의 형태로 지금 여기의 우리와 함께 공존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나는《논어》와《맹자》, 그리고 조선 여성들이 남긴 구구절절하고 애틋한 사연들을 소환하는 속에서 현재의 나, 혹은 우리의 삶을 발견해보고자 한다. 과거의 시공간에 머물렀던 대상이 지금 실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기억과 느낌, 정신의 영역에 남아서 지금 여기의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누구나 잘 아는 공자의 말이다. ‘옛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안다’에서 혹자는 ‘옛것을 익힘’에 초점을 두어 공자의 보수성을 말하기도 하고 또 다른 혹자는 ‘새로움을 알기’에 주목하여 공자의 진보성을 말하기도 한다. 분명 공자는 앞선 주나라를 모범으로 삼았고, “나는 옛 성현들의 말씀을 기술하는 것이지 새로운 창작을 하지는 않는다(述而不作)”고 말하였다는 점에서 복고적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공자가 옛것만을 고집하는 ‘라떼 꼰대’였다는 평가에는 ‘공자는 그랬다’라기 보다는 과거의 점들을 지운 채고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고 싶은 우리의 시각이 꽤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냥 ‘옛것을 익히자’거나 혹은 ‘새로운 것을 알라’고 말하지 않고 ‘옛것을 익혀서 새로운 것을 알라’는 공자의 말에는 무엇을 익히고 그것을 어떻게 새롭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당부가 담겨 있다. 우리의 삶에서 과거는 단지 우리가 잊고 있었을 뿐 그 느낌과 향기는 단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지속’인 것이고,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우리의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순간순간을 담은 조각으로서의 기억은 다양한 상상력을 통해 창조적인 기억으로 전환되곤 하기 때문이다.

상상은 현실과 유리되어 보이지만 과거를 통한 상상놀이, ‘유희적’ 상상 후에는 과거에 대한 고정관념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을 향한 비전이 다가옴을 발견할 수 있다. 유희의 사전적 정의는 ‘즐겁게 놀며 장난함’으로 즐거움과 흥겨움을 동반하는 자유롭고 해방된 인간 활동을 말한다. J.호이징가는 “유희의 목적은 행위 그 자체에 있다”라 말한 바 있으며 이렇게 ‘행위’에 초점을 두어 유희를 이해해보면 유희에는 어떤 것으로 고정화되거나 절대화되는 의미는 들어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일정한 방법으로 재미있게 논다는 의미, 즐겁게 노는 상태로의 전이를 의미하는 유희에서 핵심은 ‘전이’일 것이기 때문이다.

전이, 옮겨짐, 이동, 변화를 전제하는 유희와 상상이 만나는 자리를 나는 2014년에 개설된 ‘고전 읽기와 글쓰기’라는 교과목을 통해 이화의 벗들과 경험하였다. 고전에 대한 유희적 상상을 하면서 지나간 시절에 이러저러하게 논의되었던 것을 살펴보고, 그것을 다시 새로운 토양 위에서 색다르게, 본래와는 아주 다른 모습으로 전환, 재배치해보기도 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이화의 벗들은 중국 근대 변혁의 시공간을 당면한 아큐가 벌이는 어처구니 없는 노예근성을 비판하기도 하고, 하위주체가 말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구조적 상황을 문제 삼으면서 아큐를 이해하기도 했으며, 나아가 우리 역시도 아큐일 수 있음을 성찰하기도 하였다. 또 <논어>를 읽으면서 가부장적이고봉건 전통의 수호자인 공자를 소환하여 호되게 비판하기도 하고, 하지만 공자가 말하는 나와 너의 관계, 따뜻한 도덕적 품성을 소유한 인간상을 만나기도 하였으며 아주 가끔은 공자의 말을 비틀어서 페미니즘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해보기도 하였다.

글쓰기 과목이지만 실용적 글쓰기 기술 보다는 고전을 읽음으로써 원 작가의 의도를 독해하는 능력은 물론, 작가의 의도를 넘어 산출될 수 있는 다양한 층위를 발견하는 역량 함양에 초점을 둔 교과목의 취지는 매 학기 강의를 마칠 때마다 훌쩍 커 있는 벗들의 모습을 만나게 해주었다. 고글 강의가 아니었다면 학기 중에 고전 4권을 읽을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면서도 성장한 자신의 모습에 자부심을 표하던 벗들의 모습은 내게 언제나 뿌듯함 그 자체이다. 이 모든 것은 고전을 읽고 토론하고 글쓰기 하면서 자기 형성, 자기 성찰, 자기 배려의 실천적 양식을 자발적으로 수행한 벗들의 공로일 것이다. 교양과목 개편 과정에서 이러저러한 현실적 이유로 이제 곧 역사의 뒤안길에 남겨질 [고전 읽기와 글쓰기]이지만, 그동안 이화의 벗들이 만들어낸 고전의 다채로운 향기들은 이화의 이곳저곳에 남아서 종종 떠올려지고 기억될 것이다. Bye! 고전 읽기와 글쓰기, Hi! 고전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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