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외환위기 이후 경기도의 한 양계장에서 실제 일어난 일이다. 사료 값이 폭등하자 닭에게 하루 세 번 주던 모이를 한 번으로 줄였다고 한다. 그러자 배가 고파진 2만 마리의 닭이 서로 싸우더니 죽은 닭의 내장을 쪼아 먹었다. 배고픔이라는 생존의 위기 앞에 닭 ‘사회’는 순식간에 무너진 것이다.

한편 지구상에서 가장 ‘사회적’인 생물은 개미라고 한다. 퓰리처상을 받은 책 『개미들』을 보면, 앞으로의 지구는 사람이 아니라 개미가 지배할 거라는 다소 ‘생뚱맞은’ 주장을 한다. 근거는 개미의 뛰어난 희생정신과 분업능력이다. 실제로 개미는 굶주린 동료를 그냥 놔두지 않는다. 개미에겐 위가 두 개 있어서 하나는 자신을 위한 ‘개인적 위’로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배고픈 동료를 위한 ‘사회적 위’로 사용한다. 한문에서 개미 ‘의(蟻)’자가 벌레 ‘충(蟲)’자에 의로울 ‘의(義)’자를 합한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인간도 개미처럼 위가 두 개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세상은 좀 더 평화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신은 인간에게 하나의 위만 허락하셨다. 그래서인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굶주림의 고통이 닥칠 때 닭보다 더 무자비한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은 위가 하나뿐인 인간이 위가 두 개인 개미보다 때때로 더 이웃의 아픔을 자기 일처럼 여기며 연대하며 살았다는 사실이다.

1935년 어느 추운 겨울밤이었다. 피오렐로 라과디아(Fiorello La Guardia) 판사는 뉴욕 빈민가의 야간 법정을 맡고 있었다. 누더기를 걸친 한 할머니가 끌려 왔다. 빵 한 덩어리를 훔친 죄였다. 할머니는 울면서 선처를 호소했다. 사위란 놈은 딸을 버리고 도망갔고, 딸은 아파 누워 있으며, 손녀들이 굶주리고 있었다. 그러나 빵 가게 주인은 냉정했다. ‘법대로’ 처리해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라과디아 판사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 할머니를 향해 이렇게 선고한다. “법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할머니, 벌은 받으셔야 해요. 10달러의 벌금을 내시거나 아니면 열흘 동안 감옥에 가 계십시오.” 그러더니 판사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주머니에서 10달러를 꺼내 자기의 모자에 넣었다. 그리고 이렇게 최종선고를 한다. “여러분, 여기 벌금 10달러가 있습니다. 방금 할머니는 벌금을 납부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굶주린 손녀들에게 빵 한 조각 먹이기 위해 도둑질을 해야만 하는 이 비정한 도시에 사는 우리 모두의 죄를 물어 이 법정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50센트씩 벌금을 선고합니다.” 그리곤 자기 모자를 법정 경찰에게 넘겨 돌리도록 했다.

다음 날 아침 <뉴욕타임스>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 보도한다. “빵을 훔쳐 손녀들을 먹이려 한 노인에게 47달러 50센트의 벌금이 전해지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된 빵 가게 주인과 법정에 있다가 갑자기 ‘죄인’이 된 70명의 방청객, 그리고 뉴욕 경찰들까지 벌금을 물어야 했다.” 그날 밤 머리끝까지 화가 난 빵 가게 주인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사람은 벌금을 맞고도 흐뭇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현재 뉴욕에는 두 개의 공항이 있다. 하나는 케네디 대통령의 이름을 딴 ‘J.F.K.’ 공항이고, 다른 하나는 이 판사의 이름을 딴 ‘라과디아’ 공항이다. 택시를 타고 무턱대고 공항에 가자고 하면 자기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다. 법보다 사회적 연대가 더 중요하다고 믿은 라과디아 판사는 뉴욕 시장을 여러 번 역임하며 뉴욕시를 오늘의 뉴욕시로 만들었다.

 

“모두 함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따뜻한 추수감사절을 기대하며”

추수감사절이 돌아왔다. 올해는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온 지 만 4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들이 플리머스 해변에 도착하던 1620년 12월26일은 극심한 추위로 산천이 꽁꽁 얼어붙은 날이었지만 그들은 나무와 바위를 끌어안고 감사의 노래를 불렀다. 새로운 땅에 정착해 첫 농사를 지었지만 그해 개척자의 절반이 굶어 죽었다. 다음 해 어렵게 첫 수확을 거두었지만 소출은 겨우 하루 옥수수 다섯 개를 배급받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 풍성한 열매를 거두어서 감사한 게 아니다. 비참한 배고픔과 처절한 가난의 한복판에서도 발견한 하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한 것이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의 기원이다.

성서의 시편 67편 6절에서는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라고 말한다. 땅이 오곡백과를 냈는데 그것은 하늘이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나 개인이 받은 복에만 감사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성서의 감사는 언제나 ‘공동체적’ 감사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양극화가 심화되어 “아랫목이 절절 끓어도 윗목이 냉골인” 사회가 되었다. 지금도 하루에 40여 명씩 자살하는 이 나라에서 우리가 맞이한 2020년 추수감사절은 이 나라 구성원 모두가 ‘함께’ 감사를 나눌 수 있는 따뜻한 연대의 절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