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기억에 남는 경험 하나를 이야기하면서 글을 시작해볼까 한다. 오랜만에 아무 일을 안 해도 되는 일요일이 생겨서 아이들에게 권해줄 만한 영화가 있는지 물어봤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추천받았는데 ‘날씨의 아이’라는 작품이었다.

찾아보니 ‘초속 3센티미터’, ‘언어의 정원’ 등 오래전에 인상적으로 보았던 작품을 만든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이어서 주저 없이 얼른 다운을 받았다. 다운을 기다리는 동안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전 작품에서 받았던 인상과 달라진 작가관이나 세계관을 만나면 어떡해야 하나 걱정도 됐다. 마치 책의 첫 페이지를 열 때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영화 감상을 시작했다. 다 보고 난 소감은 어땠을까. 답은 “보길 잘했다”였다.

영화의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지는 않겠지만, 왜 내 소감이 “보길 잘했다”인지 설명하려면 약간의 내용 소개가 포함되어야 할 것 같다. 샤머니즘적인 아이디어를 사용한 이 영화에는 날씨를 맑게 해달라는 인간의 소원을 하늘에 전달하는 ‘맑음소녀’가 등장한다. 이 소녀가 소원을 빌 때마다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밝은 태양이 나타난다. 보고만 있어도 찌푸둥했던 마음이 환해질 정도로 쨍하고 아름다운 빛이 우리를 비춘다. 각 개인들에게는 절대적인 의미를 가졌을 여러 종류의 행사들이 맑음소녀의 기원을 통해 환하게 갠 날씨와 함께 진행될 수 있었다.

물론 이에는 대가가 있다. 한 번의 기원이 이뤄져 쨍한 날씨를 갖게 될 때마다 맑음소녀의 몸은 조금씩 투명해진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영화의 배경인 도쿄에 그치지 않는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이 비를 멈추게 하는 방법은 단 하나, 맑음소녀가 제물로 바쳐지는 것이다.

이 영화가 클라이맥스를 만들기 위해 사용한 갈등 구조가 바로 이것이었다. 비가 너무 내리다 못해 지형이 바뀌어가는 도쿄를 구하기 위해서는 맑음소녀의 제물화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이 소녀가 제물로 바쳐졌을 때 맑음소녀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맑음소녀 자신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헤어짐이 있게 될 거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공익과 사익의 충돌이다.

해안선의 높이가 달라질 정도로 계속된 비 때문에 도쿄의 많은 가옥과 시설들이 물에 잠기고 사람들은 살던 집을 떠나 좀 더 높은 지형에 자리한 집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버스를 타고 다니던 길을 배로 가야 하는 변화가 생겼다. 그 와중에 이런저런 소중한 것들을 잃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있는 나조차도 아까 보았던 쨍한 하늘이 간절하게 느껴질 정도로 도쿄에는 지루한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고, 그렇게 바뀌어버린 사람들의 일상이 너무나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쿄의 비를 그치게 하고 원래의 해안선을 되찾기 위해 맑음소녀가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지형이 바뀌고 생활 모습이 달라져서 불편한 건 맞지만 그런 불편함 정도로 한 개인의 삶이 희생되어야 한다면 차라리 조금씩 함께 불편하고 개인의 희생이 요구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 같다. 목적이 아무리 고귀하더라도 인간 한 개인의 삶 그 자체보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니까 말이다.

다행히도 영화는 한 소녀의 희생으로 전체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영화를 다 보고난 후 보길 잘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우리가 조금씩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각 개인의 삶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라는 나의 생각에 동의하는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난 것 같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괜스레 누군가와 공감한 것 같은 일요일 오후였다.

물론, 이 두 측면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면서 살 수는 없다. 공공의 이로움과 사적인 행복 추구 모두 소중하다. 모두를 이롭게 하기 위해 개인이 조금 양보해야 할 순간도 있을 것이고, 그 무엇보다도 개인의 안녕과 평화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순간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이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고려하며 매 순간을 결정하고 행동한다.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잘 고려하여 결정할 것인지는 금방 만들어지는 기준이 아니라 개인마다 각각의 인생을 살아나가는 긴 시간을 통해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는 개인의 타고난 기질, 양육 환경, 그 외의 경험 등이 함께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한때는 공익을 위한다는 가치가, 혹은 타인을 위한다는 가치가 너무 강조되면서 개인의 희생과 포기가 영웅시되던 시기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난 공공의 이로움 만큼 우리들 각자도 이로워야 할 존재이며, 우리들 하나하나의 존재와 시간이 소중히 다뤄질 수 있어야 그런 우리들이 모인 ‘다 함께’가 편안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가진 나이기에 가끔 아이들에게 혹은 후배들이나 제자들에게 당부한다. 나의 양보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누군가에게 양보했다면 그런 행동을 결정한 자기 자신을 충분히 칭찬하고 사랑해 주라고 말이다.

긴 고민 끝에 공공(이때 공공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혹은 내가 속한 다소 작은 공동체뿐 아니라 가족도 해당될 것이다)의 이득을 위해서 혹은 타인을 위해서 무엇인가 양보하기로 결정했다면 그 양보에 가려진 진짜 자신의 욕구를 하찮게 생각하지 말고 진지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고도 당부한다. 화창한 날씨를 얻기 위해 많고 많은 사람 중 한 명 정도는 희생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회보다는 흐린 날씨로 조금씩 불편하더라도 그 한 사람조차도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나는 조금 더 행복할 것 같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