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드라마 입문 수업에서 비극의 전범인 <오이디푸스 왕>을 학생들과 함께 읽었지만 테베에 퍼진 전염병은 플롯의 ‘발단’일 뿐 수업의 중심 주제가 되지 못했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의 공포가 극에 달했던 2020년 봄 학기, 작품 초반에 나오는 역병에 대한 생생하고 구체적인 묘사가 문학적 은유가 아닌 체험적 사실로 읽혀지기 시작했다. 소포클레스가 이 극을 집필한 기원전 430년 경 아테네는 전쟁과 역병이라는 이중의 재난 속에 허덕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인구의 사분의 일의 목숨을 앗아간 역병은 신화 속 사건도, 문학적 상징도 아닌 동시대 최대의 난제였고, 시민 전체가 참여하는 연극경연대회의 최다 수상자일 뿐 아니라 지도자 페리클레스의 측근으로 정부 요직을 두루 거친 소포클레스로서는 어떤 식으로든 역병이라는 국가적 고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시민 관객과 소통해야만 했을 것이다.

전쟁과 역병의 와중에도 봄가을 두 차례 연극경연대회가 열렸고 아테네인들은 원형극장에 모여 앉아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 속에서 아테네를 구해줄 영웅이 무대 위에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가 바로 오이디푸스다. 오이디푸스는 뛰어난 지성과 강한 의지로 신탁이 역병의 원인으로 지목한 선왕의 살인자를 추리해나간다. 그는 국민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공감의 지도자이고, 이성적 추론에 따라 증거를 수집하고 합리적 진실을 추적하는 실증적 지도자이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을 끝까지 책임지는 신의의 지도자이다. 살인자의 범위가 점점 자신으로 좁혀오는 상황에서도 추적을 멈추지 않았고, 살인자를 찾는 즉시 테베로부터 추방하겠다는 그의 약속은 한 치의 타협도 없이 그대로 지켜진다. 바로 자기 자신에게.

한 사회는 그 구성원들의 지적, 윤리적, 심미적 수준에 걸맞은 영웅을 갖게 된다. 소포클레스가 제시한 전염병 시대의 영웅은 재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발견하고 추방이라는 벌을 스스로에게 내림으로써 나라의 분열을 막는다. 그는 공동체 내에서 가장 연약한 대상을 희생양 삼아 위기를 모면하려 하거나, 남에게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려 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는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왕이 되었고 ‘그(살인자)는 누구인가’라는 신탁의 수수께끼를 풀어 도시를 위기에서 구하지만, 그가 가진 가장 중요한 영웅적 자질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마지막 질문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했다는 것이다. 소포클레스는 결국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한 여정과 노력이 각자의 삶이고 그것이 운명을 만든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 ‘그는 누구인가’로 갑론을박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자기 안에 있는 깊은 우물을 들여다 볼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가차 없는 진실을 인정하고 온전히 책임지는 것은 더욱 어렵다.

역사적으로 질병의 전염과 대유행은 인간의 삶의 방식과 사회문화적 가치관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정상적’ 삶이 무너지고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대안들이 제시되면서 기존 가치에 대해 새로운 문제의식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팬데믹은 그래서 위기이자 기회이다.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라는 새로운 유형의 영웅을 통해 벼랑 끝에 선 아테네인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앞만 보고 달려가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스스로 질문할 수 있는 기회. 소포클레스의 영웅은 그 가능성이 모두에게 열려있었다. 아테네인들이 역병의 와중에도 극장의 문 안으로 들어간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코로나19가 마지막 기승을 부리고 있는 지금, 우리도 두 갈래 길 앞에 서 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갈 것인가. 나는 ‘뉴노멀’의 시대가 선과 악이 뚜렷한 멜로드라마가 아닌 서로 다른 선의(善意)가 치열하게 토론하는 그리스 비극을 닮기를 바란다. 세상에서 가장 난해한 수수께끼의 답이 ‘인간’과 ‘자신’이라는 오이디푸스의 교훈을 되새긴다면 나의 선(善) 안에 일말의 악의가 존재하고 있음을, 상대방의 악(惡) 속에 선의도 포함되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비판도 정확해야 상대를 설득할 수 있고, 양 쪽이 모두 변해야 함께 살아갈 수 있다. ‘뉴노멀’의 시대에는 멜로드라마의 수준을 넘어 막장으로 치닫는 흑백논리와 권선징악의 그 놀랍고 단순한 ‘순수성’의 신화가 사라져야 한다. 우리 모두는 평생을 두고 탐구할 가치가 있는 수수께끼이자 미스터리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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