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주약학과 교수
이공주약학과 교수

지난 학기 공직에서 돌아오니 코로나19로 온라인 강의가 시작됐다. 꽃피는 아름다운 교정에서 학생들을 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이 컸다. 처음 해보는 온라인 강의지만 지식만 전달하려 하지 않고 캠퍼스 풍경과 내 마음을 전달하려 많이 노력했다. 많은 사람의 우려와 달리, 디지털 네이티브인 학생들은 온라인 강의를 차분히 받아들였다. 온라인에서 이뤄진 여러 상호작용을 통해 나는 오히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학생들과 아주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화에서 보낸 시간이 길어질수록 학생들에 대한 대견한 마음이 커지는데, 이번 학기에는 내가 더 큰 힘을 받은 것 같아 고마웠다. 대학 4년의 경험을 통해 하루하루 쌓아올린 힘으로 앞으로의 긴 인생 여정을 살아갈 우리 학생들의 미래를 생각하니 교수로서, 과학자로서, 선배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괜스레 벅차오른다.

사람들은 흔히 미래를 예측한다고 한다. 그러나 미래는 예측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행동으로 만들어지는 중이다. 현재에 충실하며 했던 일이 쌓여 오늘을 만드는 변혁이 됐던 경우들이 적지 않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과학지식 중에 상당수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 서구사회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우리 삶을 바꾸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화학의 주기율표, 공유결합을 포함한 화학결합, 물리의 양자역학, 생명에서 DNA의 이중나선구조와 관련된 다양한 지식들 모두 그때 당시에 부각된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현재를 열심히 살아간 이들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 시기 우리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이러한 현대과학의 발전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나도 지난 30여 년간 공부해오며 새로운 지식은 당연히 서양 것이라는 생각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우리가 ICT 등 많은 분야에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냈고, 이미 세계를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 ‘설마’하지만, ‘정말, 그런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지난해 대통령 과학기술보좌관으로 일하며 나는 이 변화를 몸으로 느꼈고 국가의 방향을 새롭게 만드는 데에 있어 변화된 상황을 적용하려 노력했다. 국가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분야의 국가정책을 수립할 뿐만 아니라, 관련 예산을 계획하고 배정하는 일,여러 부처의 다양한 정책 현안에 과학기술/정보통신분야를 접목시켜 발전시키는 일을 주도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촛불에서 시작한 희망으로 우리는 ‘첨단과학기술에 뿌리를 둔 민주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건강하고 안전하며 풍요로운 삶의 혜택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국내외 여러 기관을 방문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일하기를 즐겼다.

나는 이 일을 하는 동안 많은 변화를 봤다. 대학과 기업, 그리고 시장이 보다 긴밀하고 신속하게 협업할 수 있도록 규제샌드박스가 시행됐다. 대표적인 예로 블록체인을 이용한 운전면허증이 우리 생활에 들어왔다. 더 이상 ‘나이’ 확인을 위해 모든 개인정보를 노출하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기술이 실용화됐다. 기술이 있어도 법이 없어 실용화되지 못했던 것들이 데이터 3법과 국가연구개발혁신 특별법, SW 진흥법, 전자서명법 통과를 통해 실현될 수 있는 기본 인프라를 얻게 됐다.

변화는 이것만이 아니다. 작년 한 해 동안에만, 미세먼지·기후환경, 바이오헬스, 시스템반도체, 소재부품장비, 원자력 등 에너지와 인공지능 국가전략이 수립됐다. 일본이 강제징용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이유로 우리나라 제일 산업인 반도체 디스플레이 산업에 일격을 가하고자 소재부품에 대한 수출규제를 단행했을 때, 나는 오히려 이번 기회야말로 우리의 소재부품장비의 자급 체계가 완성될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라 믿었다. 우리나라의 변화된 ‘실력’에 대한 확신과 ‘주권은 외교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그 근거였다. 이러한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예기치 않은 코로나19 상황을 겪으면서도, 나는 진단과 방역은 물론, 온라인 교육 등에서 지식과 기술을 가진 전문가를 잘 배치하고 마음껏 일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공동체의 최고 경쟁력을 끌어낼 수 있는 것임을 확실히 배울 수 있었다.

 

과학기술보좌관 일을 하며 이화인으로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것은 내가 ‘이화’라는 종합 대학교에서 보낸 시간의 소중함을 발견했을 때였다. ‘인공지능 국가전략’ 수립과정에서 많은 전문가들이 기술적 측면에 대한 강조로 치우쳤지만, 나는 2018년 본교 인문과학원에서 개최한 <4차 산업혁명시대 인문학에 길을 묻다>라는 특별 프로그램의 자료집을 참조하며 기술혁명에서 자칫 잊기 쉬운 기술의 인문학적 가치와 보완점 등을 얻을 수 있었다. 여러 대학 전공의 교수님들과 교류하며 쌓아왔던 ‘이화’의 지식이 세상을 보다 균형있게 만들어 가는 데에 힘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왜 옛 선생님들께서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성 교육에 경계를 두지 않고 최선을 다하셨는지 밖에 나가보니 더 잘 알 수 있었다. 이화에서 얻은 지혜로, 나는 대학의 지식 생산을 귀하게 지원해야 한다는 신념을 놓지 않았다.

과학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은 창의성과 전문성을 지닌 학자들의 ‘시간 축적’의 산물이다. 그래서 세계를 선도할 수 있는 지식생산 환경을 조성하고, 이를 존중하는 문화생태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국가를 경험하고 이화에 다시 돌아오며, 우리가 가진 학문 전 분야에서 어떻게 학생들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신나게 공부하고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 우리 동료 교수들도 어떻게 하면 세계적으로 수월성 있는 연구를 지난 30년간 내가 했던 것보다 더 잘 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진다. 새로운 길에 걱정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나는 이화 공동체의 미래를 믿는다. 미래를 열어가는 이화 구성원의 힘과 열정을 잘 알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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