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는 바로 ‘다양성’일 것이다. 다양한 민족이 살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다. 다양성의 나라 미국에서 내가 교환학생으로 온 버몬트주는 미국에서 ‘가장 하얀 주(whitest state)’에 속한다. 가장 하얀 주란, 주 안에서 살고 있는 인종 중 백인의 비율이 가장 높은 주 중에 하나라는 의미이다. 버몬트에서는 백인이 94%, 흑인이 2%, 아시안이 2%, 히스패닉이 2%를 차지한다. 아시안이 거의 없는 버몬트미국의 캘리포니아주 혹은 뉴욕의 모습에 서 생각하는 다인종의 모습들과는 전혀
3월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여성의 날이 다가오자 학교 곳곳의 TV에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는 홍보가 띄워졌다. 여러 행사들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띈것은 ‘Women as seen through the Prado’였다. (프라도는 마드리드에 있는 미술관으로, 런던의 국립미술관,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과 함께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학교 애플리케이션에서 해당 행사를 찾아봤는데, 대기 명단까지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인기 덕분인지 그 다음주에도 같은 행사를 진행한다고 해 티켓을 신청할 수 있었다.행사는 남학생들과 여
버몬트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낸 지 70일이 되어가는 지금,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느꼈다. 교환학생의 생활 중 여행이 아닌 실제로 미국 학교에 다니면서 배운 문화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과 의견을 표출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그 점이 어떻게 보면 한국의 대학교와 굉장히 상반되고 문화적으로 다른 점이라고 생각이 들었다.“What is your pronoun”이라는 질문은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듣고, 왜 물어보는지 의문이 들었던 질문이다. 학기 초에 오리엔테이션에서 한 명씩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해야 할
어느덧 스페인에 온 지 10주가 넘게 지났다. 서울과 8시간이 차이 나는 마드리드는 날씨부터 음식, 생활 방식 등 많은 것이 다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차이는 대화에 관한 것이다. 대화를 여는 방식부터 하는 이야기까지 모든 것이 낯설었다.스페인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스페인에 거주하는 인구 중 17.23%는 이민자라고 한다. 사실 스페인에 잠시라도 살아본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단골 과일 가게 사장님은 모로코인, 지금 거주하고 있는 집의 주인아주머니는 콜롬비아인, 시내 젤라토 맛집의 점원은 프랑스
‘아기가 된 기분이다.’ 내가 교환학생을 오고 한 달 동안 일기장에 가장 많이 쓴 문구이다. 교환학생으로 간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중의적인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모르겠는 환경에 던져진 아기처럼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이고, 또 다른 의미는 내가 안정적이라고 생각했던 알을 깨고 다른 세상에 나와 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나는 오래전부터 미국에서 공부해 보는 것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미국에서 학생으로 생활해 보고 싶었고, 미국 교육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그렇기에
보는 순간 ‘내가 평생 이 기억으로 살아가겠구나’ 하는 순간이 있다. 마드리드의 햇살이 내겐 그랬다.마드리드에 오게 된 것은 찰나의 선택 덕분이었다. 처음엔 축구를 좋아해 유럽에 교환학생으로 오고 싶었고, 그중에서도 학생 신분으로 살기 좋다는 독일을 꿈꿨다. 독일을 목표로 토플을 공부하고, 학점을 맞추고 파견교 목록이 정리된 엑셀을 훑었다. 다른 학생들처럼 파견 보고서와 블로그 등을 살펴보며 목록을 추렸고, 우선 지망을 전부 독일로 채웠다. 그러다 우연히 어떤 블로그에서 ‘노는 걸 좋아하면 독일 말고 스페인으로 가세요’라는 글을 보
이 기사가 공개될 무렵이면 내가 일본에 교환학생으로 온 지 80일도 넘어가게 된다. 한국에서 나는 쭉 부모님과 함께 살아서 기숙사 생활을 해본 적도, 자취 경험도 없었다. 그런 내가 용감하게도 홀로 외국에 나온 지도 이제 삼 개월을 채우게 되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신기하고, 스스로 뿌듯해지기도 한다. 처음 교환학생을 준비할 때, 당연히 걱정이 많았다. 이렇게 오래 외국에 나와본 적은 물론, 한국에서도 혼자 생활해 본 적이 없으니 두렵기도 했다. 나는 집안일에 서투른 데다 생활력이 떨어지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때문에 물리
한국과 오스트리아는 다른 점이 많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대부분의 상점이 평일 저녁 7시면 문을 닫고, 일요일에는 문을 연 곳을 찾기가 힘들다. 아날로그 친화적인 환경이다. 거의 모든 아파트는 열쇠로 여닫아야 한다. 언제 어디에서 마주하더라도 서로 눈이 마주치면, ‘Guten Morgen(좋은 아침)’ 혹은 ‘Hallo(안녕)’의 인사말을 습관처럼 내뱉는다. 이렇게 내가 살아온 환경과는 다른 것들을 마주하게 될 때, 자연스럽게 한국에서 생활하던 모습들이 겹치곤 한다. ‘이런 점은 한국이 더 낫네 혹은 더 불편하네’와 같은 감상부터, ‘
일본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 후지산, 초밥, 온천, 벚꽃…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아니메(*‘애니메이션’의 일본식 표기)’와 다양한 캐릭터 산업일 것이다.솔직히 고백하자면 나 역시도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드라마를 보면서 처음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교환학생 행선지를 일본으로 정한 것 역시 그 영향이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 지낸 지 두 달이 지난 지금, 직접 느낀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좋아할 수 있는 생활’에 대해서 말해보고 싶다.막 입국한 후 이번 학기 교환학생들을 처음 학교로 불러 학교생활이나 일본에서의 생활
외국인 친구를 많이 사귀고 오자. 나의 세상을 넓히자! 교환학생으로 파견을 확정 짓고 나서 다짐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많이 만날 수 있는 한국인 친구들이 아닌가. 파견 전에는 외국까지 가서 한국인들과 놀러 다니고, 어울리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 편으로, 나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유럽에 온 지 두 달이 지난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내가 생각했던 ‘외국인‘과 친구가 되는 것에는 더욱 큰 노력이 필요하며, ’외국인‘에 대한 나의 기준에 오류가 있었다는 점이다.내가 파견된 학교는 매 학기 많은 교
“페미니즘과 데모로 유명하지 않나요?”지난 9월 말에 아오야마가쿠인 대학에서 열린 유학생-본교생 글로벌 교류 행사에서, 한국에서는 이화여대에 다니고 있다고 소개하자 한국에 관심이 많다는 남학생이 한 말이었다. 나와 함께 파견된 벗은 둘이 동시에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한국에서 그동안 ‘시달린’ 것이 많아 바로 고개를 끄덕이기가 망설여졌다. 그런데 남학생은 그 의미를 이해했는지, 곧 손을 내저으며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니 오해 말아달라’라고 덧붙였다.내가 파견된 아오야마가쿠인 대학교(‘가쿠인’은 ‘학원’이라는 뜻으로, 재단명이 ‘
“내일 소 보러 갈래?” 오스트리아에 와서 처음 사귄 외국인 친구가 한 제안이다. ‘소’를 보러 가자니, 내가 아무리 유럽의 시골 마을에 와 있다고 하지만 여기에선 소를 보고 노는 것이 흔한 것이었던가? 고층 건물이 즐비한 서울에 지쳤던 사람으로서 놓치기 싫은 제안이었다.행사가 열리는 마을에 도착했다. 기차 문이 열리고 보이는 광경은 활기가 가득했다.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음악 소리, 오스트리아 전통 음식을 파는 천막들, 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들.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 노부부, 친구들끼리 온 사람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즐기고
“금요일에 파티 갈 거지? 그때 봐.” “너 안 와? 언제쯤 도착해? 만나서 같이 가자.”개강을 맞이한 지 약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은 현시점, 학교에서 열린 행사는 족히 일곱 개가 넘었다. 신입생 환영 파티, 고향 소개하기 파티, 학생문화관 슬립오퍼 파티 등등. 각종 행사가 줄지어 이뤄졌다. 어제 뭐했어? 파 티 갔어. 오늘은 뭐해? 파티 가려고. 오, 내일 은? (장보고) 파티갈 것 같아. 물론 학기 초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한국과는 달리 파티에 ‘진심’인 학생들을 보며 경외감을 느꼈다. 파티 좋지. 하지만 파티는 주말의
“음악 공부하러 가는 거야?” 오스트리아 교환학생이 되었다고 이야기했을 때 단언컨대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아예 아니라고는 대답할 수 없겠다. 그 옛날부터 흥얼대던 콧노래, 그저 해맑기만 했던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어진 나의 낭만. 하지만, 처음부터 오스트리아를 바라보며 교환학생을 준비했던 것은 아니다.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교환학생 파견 확정 후 매일같이 생각했던 말이다. 토플만 잘 보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은 할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줄은 몰랐다.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합격이 됐다고 해서 파견이
“근데 왜 하필 헝가리야?”교환학생 합격 소식을 주변에 알리면 대략 두 명 중 한 명꼴로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그도 그럴 것이, 헝가리는 교환학생을 꿈꾸는 학생들이 목표를 정할 때 쉬이 떠올리는 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미국, 영국, 독일 등의 국가를 선호하며, 실제로 해당 국가들은 뚜렷한 장점을 갖는다. 예컨대 미국과 영국은 영미권 국가이기에 어학연수에 적합하다. 독일은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는 아니지만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혜택이 쏠쏠하다. 하지만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야경이 아름답다는 것 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
기숙사에 떨어졌다. 집을 구해야 한다. 기숙사에서 떨어지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6개월 동안 머물 집을 이 먼 타지에서 어떻게 구한다는 말인가. 막연한 두려움이 나를 덮쳐왔다.어떻게든 집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검색하던 중 ‘WG gesucht’라는 사이트를 알게 되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 일부 지역에서 집을 거래하는 사이트로, 주로 셰어하우스(독일어로 ‘WG’이다.) 형태의 매물이 올라오는 곳이었다. 오히려 좋다고, 외국인과 함께 살아볼 기회라고 생각하며 기대에 찼던 것도 잠시. 난관에 봉착했다.
4.3 만점에 2.1. 숫자의 구성에서 어렴풋이 티가 났겠지만, (누군가의) 학점이다. 학우들의 교환학생 경험을 공유하고, 각자의 배움과 느낌을 자유로이 표현하고자 마련된 본 코너의 성격을 감안한다면 다소 당황스러운 도입일 것 같다. 졸업 직전 헝가리행을 택했다더니 갑자기 성적 공개? (심지어 당당히 꺼내 보이는 저의가 도저히 읽히지 않는 미천한 점수다.)2018년도부터 이화에 발을 들여 졸업을 한 학기 앞둔 나의 1학년 첫 학기 성적은 4.3 만점에 2.1이었다. 맞다. 너무 재밌는 학기를 보낸 나머지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러울 학
북유럽의 정서를 보여주는 유명한 사진이 있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적어도 5미터는 되는 거리를 두고 서 있는 모습. 노르웨이에 산 지 1년이 되어가는 나에게 누가 이 사진이 진짜냐고 묻는다면 아마 맞다고 대답할 것이다.오슬로에서 대중교통을 타면 버스나 지하철 안의 좌석이 꽉 차지 않았더라도 사람들이 자리에 앉지 않고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차가 만원인 경우에만 더 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도록 자리를 채워서 앉고 대부분 모르는 사람의 바로 옆자리에는 잘 앉지 않는다. 서로 사회적 거리를 두는 것이다.노르웨
교환학생은 중학생 때부터 나의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다.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 외국의 캠퍼스에서 즐기는 대학 생활, 자유로운 분위기와 새로운 경험들, 그리고 매일같이 떠나는 여행!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는 것 자체로도 나에게는 굉장한 모험이자 설렘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해외여행이 힘들어지며, 교환학생에 대한 로망은 더욱 커져만 갔다. 올해가 시작하자마자 탄 프랑스행 비행기에서는 프랑스와 관련된 영화들과 드라마들을 보며 떨리는 마음에 잠도 자지 못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의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도착한 첫 주에는 기차에 여권을 가지고
핀란드 헬싱키를 배경으로 하는 일본 영화 ‘카모메 식당’(2006)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헬싱키에 있는 일본 식당에서 일본인 여성이 “왜 이곳 사람들은 이렇게 여유로워 보이는 걸까요”하고 묻는다. 그때 뒤에 앉아있던 핀란드인 청년이 “숲 때문이에요”라고 답한다. 질문한 이는 대답을 듣고 바로 숲에 다녀오겠다며 이야기를 나누던 식당을 나선다.대학에 와 서울에 살면서 마음이 복잡할 때면 이 장면을 종종 떠올리곤 했다. 노르웨이를 교환학생 목적지로 정할 때도 마음 한편에 자연이 나에게 여유를 가져다줄까 기대하며 떠나왔던 것 같다. 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