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 가게와 노을. 제공=최한비
과일 가게와 노을. 제공=최한비

 

어느덧 스페인에 온 지 10주가 넘게 지났다. 서울과 8시간이 차이 나는 마드리드는 날씨부터 음식, 생활 방식 등 많은 것이 다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차이는 대화에 관한 것이다. 대화를 여는 방식부터 하는 이야기까지 모든 것이 낯설었다.

스페인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스페인에 거주하는 인구 중 17.23%는 이민자라고 한다. 사실 스페인에 잠시라도 살아본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단골 과일 가게 사장님은 모로코인, 지금 거주하고 있는 집의 주인아주머니는 콜롬비아인, 시내 젤라토 맛집의 점원은 프랑스인이다. 이렇게 그들의 출신지는 모두 다르지만 그들의 대화 방식엔 공통점이 있다. 어떤 것에도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오직 필요한 것은 나다.

지난주에는 길을 걷다가 오랜만에 집 앞 단골 과일 가게 사장님을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Hola’를 외치며 손을 흔들었고, 그는 내가 저번에 모로코에 방문할 계획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하고 어떻게 되어 가냐며 물었다. 항공권의 가격 때문에 고민 중이라고 답하자, 항공권을 찾아주고 꼭 먹어야 할 것을 알려주었다. 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날 나는 사장님의 고향은 모로코의 동쪽이지만 현재는 서쪽에 거주하신다는 것, 가게를 비웠던 기간에는 여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로코 전통 방식의 결혼식 영상과 모로코의 바닷가 영상도 보았고, 가게에 있던 그의 남동생과도 인사했다. 우리는 짧은 스페인어와 영어로 대화를 쉬지 않고 이어갔고, 끊어지지 않을 것만 같던 대화는 가게에 손님이 들어왔을 때 끝났다. 지금은 그의 도움 덕분에 즐거운 모로코 여행을 마치고 온 상태인데, 과일 가게 앞을 지날 때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지만 대화를 시작하면 다음 일정에 늦을까 봐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상황과 장소는 물론이고 언어도 이들에겐 전혀 장벽이 되지 않는다. 집 주인아주머니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고, 나는 스페인어를 거의 하지 못한다. 그래도 스페인에 사는데 어느 정도는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스페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마트에서 하는 ‘봉투 필요하세요?’를 알아듣지 못해서 늘 장바구니를 뽐내듯 들고 다녔다. 아주머니와 가장 길게 대화한 것은 2주 전이었다. 새벽 1시에 시끄러운 세탁기 소리를 해결하러 나왔다 만났는데, 세탁기 앞에서 휴대전화 번역기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탈수가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콜롬비아와 한국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날 우리가 서로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 뒤 화장실에 다녀오다 아주머니 와 아주머니의 딸, 그의 남자친구를 마주쳤을 때, 대화는 다시 시작되었다. 그때 잠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누구도 내가 잠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고, 대화는 딸의 “궁금한 게 있으면 문자로 또 물어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40분 뒤에 끝났다.

솔직히 이제 이들과의 대화를 ‘Small talk’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다. 길 가다 한 번 마주치면 내가 뭘 하려고 했든 간에 적어도 30분 동안은 쉬지 않고 대화를 해야 하는데, 이건 ‘Big talk’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마드리드 생활에서 기대한 것은 맛있는 과일과 스페인어 실력 향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과일 가게를 떠올리면 그곳에서 샀던 귤의 향과 사과의 맛보다 아저씨의 웃음이 먼저 떠오르고, 스페인어를 떠올리면 콜롬비아인들의 열정과 자부심이 떠오른다. ‘Hi’는 없고, ‘Hi, How are you’만 있는 이곳에서 기대와 다른 것들을 배우고 버티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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