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8층에 위치한 4인 셰어하우스. 창문에서 보이는 풍경이다. 제공=전소이씨
건물 8층에 위치한 4인 셰어하우스. 창문에서 보이는 풍경이다. 제공=전소이씨

기숙사에 떨어졌다. 집을 구해야 한다. 기숙사에서 떨어지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6개월 동안 머물 집을 이 먼 타지에서 어떻게 구한다는 말인가. 막연한 두려움이 나를 덮쳐왔다.

어떻게든 집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것저것 검색하던 중 ‘WG gesucht’라는 사이트를 알게 되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 일부 지역에서 집을 거래하는 사이트로, 주로 셰어하우스(독일어로 ‘WG’이다.) 형태의 매물이 올라오는 곳이었다. 오히려 좋다고, 외국인과 함께 살아볼 기회라고 생각하며 기대에 찼던 것도 잠시. 난관에 봉착했다. 사이트 언어가 온통 독일어였다.

오스트리아는 유럽 국가 중에서 영어 사용량이 높은 편이지만, 모든 행정 절차와 공식 사이트 등은 독일어로 구성된다. 정확히 하자면, ‘오스트리아의 독일어(Österreichisches Deutsch)’로 구성된다. 고대 로마 제국에서 라인강 동편의 지역인 게르마니아 마그나에 거주하던 집단은 그들만의 독자적 언어를 사용했는데, 이를 어원으로 둔 것이 ‘도이치(Deutsch)’이다. 게르마니아 마그나에 거주한 다양한 민족이 각각의 국가를 세웠고, 이들은 오늘날의 독일로 연결되는 ‘도이치 제국’으로 통일되었다. 이 과정에서 오스트리아는 독자적인 국가로 남았고, ‘오스트리아의 도이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난관’이라 칭한 것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나는 독일어를 할 줄 모른다. 아는 말은 ‘Guten Tag(안녕하세요)’뿐. 결국, 구글 번역기와 파파고를 사용하여 막무가내 독일어로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온 교환학생입니다. 친구와 함께 거주하고 싶어요. 9월부터 두 명이 살 수 있나요?’ 를 열 몇 개쯤 보낸 후에야 답장이 왔다. 1년 이상 거주할 사람을 찾기에 불가능, 입주일이 맞지 않아 불가능. 계속되는 거절에 지쳐 있을 때, 이상한 답장이 하나 도착했다. ‘애인과 함께 거주할 수 없기에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내가 보낸 메시지를 살폈다.

여기서 짚어야 할 점이다. 독일어 명사는 여성형, 남성형, 중성형으로 구분된다. 친구를 의미하는 단어도 여성형과 남성형으로 구분되는데, ‘Freund’는 ‘남자인 친구’를 뜻하고 ‘Freundin’은 ‘여자인 친구’를 뜻한다. 이 단어들의 앞에 ‘meine(나의)’이라는 정관사를 붙이면 각각 ‘(나의)남자 애인’, ‘(나의)여자 애인’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파파고는 이를 알려주지 않았다. 여자인 친구와 함께 살고 싶었던 나는, 여성 전용 셰어하우스에 당당하게 남자친구와의 동반 입주를 요구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이쯤 되니 울컥 억울함이 솟았다.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기말고사 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집만 찾았는데, 이렇게 터무니없는 실수를 했다니. 파견을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마저 샘솟았다. 친구에게 하소연하자, 친구는 한 학기를 즐기기 위해 교환학생이 된 것 아니냐 물으며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나를 위로했다. 순간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교환학생을 신청하던 때의 목적이 ‘즐거운 경험’이었다는 것. 그토록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은 서둘러 문제를 해결하고야 말겠다는 오기와 조바심이었으리라. 하지만 한 가지에 사로잡히면, 종종 상황의 본질이 흐려지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직 파견까지는 두 달이 남아있었다. 1분에 한 번씩 습관적으로 사이트를 보던 것을 멈추고, 검토조차 하지 못하고 보내던 메시지를 천천히 다시 작성했다. 여유를 잃지 말자. 나는 이 모든 상황을 즐길 수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를 다독였다. 마음가짐을 달리 한 것이 힘이 되었을까, 조건에 맞는 매물이 금세 나타났다. 계약서를 받고, 비자도 무사히 발급받았다.

이제 집을 구한 지 한 달이 넘어간다. 아직도 당시를 회상하면, 심장이 터질듯한 불안감과 두려움이 생경하다. 시차를 맞추려 새벽 네다섯 시까지 깨어있기는 기본, 핸드폰 알림음을 최대로 해놓고 잠들었다가 소리가 울리면 잽싸게 일어나 확인한 것도 수십 번이었다. 이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차오른다. 오스트리아와 약 8,600km 떨어진 대한민국에서 독일어도 모르는 채로 집을 구했는데, 못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온통 ‘집’ 생각뿐이던 날들. 교환학생에 합격했을 때의 설렘이 모두 퇴색되었던 시간. 혹여 기숙사가 보장되지 않는 학교로 교환학생을 준비하거나, 벌써 기숙사에 떨어져 낙담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조심스레 첨언해 본다. 교환학생을 준비하던 그때의 동기를 떠올리길. 우리 모두 조바심과 불안감이 아니라 즐거움과 설렘을 원하지 않았나. 물론 고생이야 좀 더 하겠지마는, 어떻게든 답은 나올 것이다. 여유를 놓지 말기를, 언젠가는 이 모든 고생이 경험으로 돌아와 우리만의 무용담이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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