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 오슬로에 있는 호수 송스반(Sognsvann)에서 사람들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strong>김해인 선임기자
여름철 오슬로에 있는 호수 송스반(Sognsvann)에서 사람들이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김해인 선임기자

핀란드 헬싱키를 배경으로 하는 일본 영화 ‘카모메 식당’(2006)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헬싱키에 있는 일본 식당에서 일본인 여성이 “왜 이곳 사람들은 이렇게 여유로워 보이는 걸까요”하고 묻는다. 그때 뒤에 앉아있던 핀란드인 청년이 “숲 때문이에요”라고 답한다. 질문한 이는 대답을 듣고 바로 숲에 다녀오겠다며 이야기를 나누던 식당을 나선다.

대학에 와 서울에 살면서 마음이 복잡할 때면 이 장면을 종종 떠올리곤 했다. 노르웨이를 교환학생 목적지로 정할 때도 마음 한편에 자연이 나에게 여유를 가져다줄까 기대하며 떠나왔던 것 같다. 척박한 땅 북유럽은 이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광활한 자연으로 이름을 떨치게 됐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 온 교환학생들에게 왜 노르웨이로 왔냐고 물으면 대부분 자연 때문에 선택했다고 했다.

노르웨이는 유럽에서 아이슬란드 다음으로 인구밀도가 낮다. 인구수는 547만명으로 한국의 10분의1 수준이지만 토지 면적은 우리나라의 약 4배다. 오슬로는 노르웨이에서 제일 큰 도시이자 수도이지만 런던, 파리 같은 도시들과는 다르게 한산하고 느긋한 편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도시로, 대중교통을 타고 쉽게 호숫가, 피오르드 해안, 산에 갈 수 있다.

사는 기숙사 단지에서 약 20분 걸으면 송스반(Sognsvann)이라는 호수가 나온다. 여름에 처음 이곳에 갔을 때 사람들은 수영하고 잔디에 누워 일광욕하고 호수 주변을 걷고 있었다. 아름다운 경관과 평화로운 사람들의 모습에 보자마자 호수와 사랑에 빠져버렸고 사는 내내 친구들과 자주 걸으러 갔다.

자연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것은 노르웨이에서 법으로 보장되는 중요한 권리다. 모든 사람의 권리(Allemannsretten)라는 이름의 관습법으로, 경작되지 않은 땅은 누구나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이다. 사냥이나 벌목 등 자연을 훼손하는 행위는 금지이지만 야영하거나 주변에 있는 딸기, 버섯 등을 따는 활동은 어디에서나 가능하다.

오슬로에 사는 동안 여름엔 친구들과 등산을 가거나 근처 해안가로 수영하러 갔고, 겨울엔 겨울스포츠를 즐기러 나갔다. 장비를 빌려 스노보드를 타러 가고 플라스틱 봉지를 들고 주변 언덕에서 눈썰매를 탔다. 언제든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자연은 친구들과 부담 없이 놀 수 있는 장소가 됐다.

자주 자연에 나가 놀다 보니 단순히 아름다운 경관만이 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공원이나 호숫가는 입장료가 없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누구와든 갈 수 있다. 야외에 앉아있을 수 있는 공원이 흔하지 않은 서울에서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려면 카페에 가야 한다. 커피 한 잔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좋지만 “어디 앉아서 이야기 좀 할까” 얘기가 나올 때마다 카페에 가는 것은 학생이라면 경제적으로 부담스럽다. 언제든 앉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자연은 사회구성원들이 어떠한 장벽 없이 어울릴 수 있는 장소가 된다.

물론 노르웨이와 한국은 다르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두 나라는 자연환경이 다르고 인구수도 다르고 쌓아온 역사와 문화가 다르다. 서울에도 자연이 더 필요하지만, 사람들이 살 공간도 없는데 여기서 어떻게 녹지를 늘리냐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뉴욕이나 런던도 똑같이 인구밀도가 높고 집값이 비싼 대도시지만 녹지 비율이 서울보다 훨씬 높다. 주거지만큼 공원 같은 녹지도 중요한 도시의 요소로 보는 것이다.

자연은 꼭 광활하지 않아도 된다. 공터에 나무와 벤치가 있다면 그곳도 작은 자연이 되고 사람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서울에 있을 때 연트럴 파크가 학교 가까이 있어 주변에 사는 친구와 자주 걷곤 했다. 카페에서 자리를 잡고 말하자니 나오지 않는 깊은 속 이야기도 잠깐 산책하는 길에서는 나오기도 했다.겨울이 길었던 노르웨이에도 이제 여름이 오고 있다. 여유가 있는 날엔 집에 있는 재료로 간식을 만들어 친구들과 공원으로 짧은 소풍을 나간다. 아마 한국에 가면 그리운 것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다. 누구나 걸을 수 있고 잠시 앉아갈 수 있는 자연, 그런 공간이 우리 모두에게는 더 필요하다.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