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살면서 손편지를 몇 번 정도 썼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 파편화된 소통 매체 덕에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편지를 써본 경험이 열 손가락에도 채 안 꼽힐 것이라고 감히 추측한다.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2004년 겨울에 태어나 초등학교 고학년 때 스마트폰이라는 신문물을 맛봤으며,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비대면 학습을 위해 공부조차 태블릿 PC로 하기 시작했으니 말 다 했다. 그럼에도, 내가 잃지 않고 싶고,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아날로그 마음 전달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들여
미국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는 바로 ‘다양성’일 것이다. 다양한 민족이 살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다. 다양성의 나라 미국에서 내가 교환학생으로 온 버몬트주는 미국에서 ‘가장 하얀 주(whitest state)’에 속한다. 가장 하얀 주란, 주 안에서 살고 있는 인종 중 백인의 비율이 가장 높은 주 중에 하나라는 의미이다. 버몬트에서는 백인이 94%, 흑인이 2%, 아시안이 2%, 히스패닉이 2%를 차지한다. 아시안이 거의 없는 버몬트미국의 캘리포니아주 혹은 뉴욕의 모습에 서 생각하는 다인종의 모습들과는 전혀
4월10일 예정된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 관심은 있지만 투표는 망설이고 있는 이화인이 있을 것이다. 망설이는 데는 합당한 이유가 있을 텐데 어떤 후보와 정당에 투표할지 판단을 내릴 만큼 정책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다고 여길 수도, 마음에 드는 후보나 정당이 없어서 참여 자체가 내키지 않을 수도 있다. 정치지식 그리고 특정 정당과 정서적으로 연결된 정도를 뜻하는 정당일체감은 정치참여를 위한 필수자원인데, 이들 자원이 결여되었을 때 투표를 망설이는 건 당연하다.후보와 정당의 정책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 투표 참여를 주저하는 마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인간은 자신이 지나왔던 모든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기억조차 하지 못한 그 순간들은 경험이 돼 인생을 이루고 때로는 삶을 관통하는 철학이 되기도 한다. 기억하는 것은 별을 찾는 것과 같다.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던 별들이 종래에는 감춰왔던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선명하지 않은 기억들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것이 아니듯이, 기억하지 못한다고 잊은 것이 아니니까.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잊을 수 없는 기억과 소중한 경험을 이야기한다.
책/벤자민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9) 우리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추구하는 바가 다양하고,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생각보다 우리는 이러한 다양성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예전에 비해 다양성을 더 존중하는 시대가 왔지만, 여전히 조금만 다르게 행동하거나 생각한다면 주변의 비판과 편견을 받는 경우가 많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의 주인공인 벤자민 버튼은 세상의 기준과는 달리 남들과 다르게 태어나, 자연의 순리와 반대로 살아가면서 다양한 고난을
장한업 불어불문학과 교수·다문화연구소장 불어불문학과 교수이자 다문화·상호문화협동과정 주임교수, 다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서울대 불어 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루앙대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9년부터 유럽의 상호문화교육을 연구하면서 이를 국내에 도입하고 확산시키고 있다. 저서로는 ‘다문화사회 대한민국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상호문화교육’, ‘차별의 언어’ 등이 있다.‘읽어야 산다’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대개 무엇을 읽는다고 생각할까요? 아마 ‘책’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가장 많을 거예요. 책에는
3월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여성의 날이 다가오자 학교 곳곳의 TV에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는 홍보가 띄워졌다. 여러 행사들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띈것은 ‘Women as seen through the Prado’였다. (프라도는 마드리드에 있는 미술관으로, 런던의 국립미술관,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과 함께 세계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학교 애플리케이션에서 해당 행사를 찾아봤는데, 대기 명단까지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인기 덕분인지 그 다음주에도 같은 행사를 진행한다고 해 티켓을 신청할 수 있었다.행사는 남학생들과 여
대검찰청 과학수사부의 9년차 DNA 감정관. 제주 전남편 살인사건, 제주 중학생 살인사건, 공주 교도소 살인사건, 부산 돌려차기 살인미수사건 등 여러 사건에서 범죄의 실체적 진실을 명확히 하기 위한 DNA 감정을 하고 있다.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명함을 교환하고 서로 하는 일을 소개한다. 명함이 오가고 나면 항상 비슷한 대화가 이어진다. 바로 다음과 같이.아, 대검찰청에 계세요? 네, 맞아요. 검사, 아니면 수사관? 하하, 둘 다 아니에요. 저는 DNA 감정관입니다. DNA요? 네, 형사 사건 의 증거물에서 DNA를 찾고 사건 관계인
버몬트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낸 지 70일이 되어가는 지금,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느꼈다. 교환학생의 생활 중 여행이 아닌 실제로 미국 학교에 다니면서 배운 문화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과 의견을 표출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그 점이 어떻게 보면 한국의 대학교와 굉장히 상반되고 문화적으로 다른 점이라고 생각이 들었다.“What is your pronoun”이라는 질문은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듣고, 왜 물어보는지 의문이 들었던 질문이다. 학기 초에 오리엔테이션에서 한 명씩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해야 할
드라마/브러쉬업라이프(2023)“지금의 기억을 그대로 가진 채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해본 적 있는 생각이다. 정말 이 기억과 지능을 그대로 유지한 채 아이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선택하게 될까. 그리고 어떤 삶을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브러쉬 업 라이프’(2023)는 어느 날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음을 맞이한 주인공이 삶을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룬 일본 드라마다. 드라마는 주인공의 죽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시청에서 일하는 주인공
어딘가에 마음을 쏟는 것. 마음을 쏟기 시작하면, 그에 대한 세계가 확장되고 그 펼쳐진 세계 속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인지하게 된다.나는 마음의 한 켠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다. 쉽게 말해, 그냥 정이 많다. 정도 많고 정을 주는 것도 좋아한다. 비록 마음이 자리잡기까지는 더딘 편이지만 지속력은 길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사물이든 무엇이던 간에 한번 마음을 붙이기 시작하면 온기가 도는 느낌을 받고는 하는데, 그 온기는 나의 많은 부분들에 영향을 미친다.최근 나는 공간으로부터 받는 많은 감정들을 경험했다. 새삼스
3월 중순, 꽃샘추위가 내려앉으니, 거리에 다시 눕시(Nuptse)가 늘어난다. 등산용품 회사 노스페이스(The North Face)에서 만든 짧은 패딩 눕시. 지난겨울에도 이게 교복인가 싶을 정도로 사방이 눕시였다. 눕시 사랑은 옷 좀 입는다는 셀럽들로부터 시작해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세대도 뛰어넘고, 서울이고 뉴욕이고 동서양도 인종도 모두 뛰어넘는다고 한다. 롱패딩 유행이 엊그제 같은데 눕시가 유행하는 바람에 엄마, 아빠들은 졸지에 아이들 입던 롱패딩을 물려 입고서 노스페이스 매장에 들어가 카드를 긁었다. 눕시 유행에 힘입어 노스
김소영(디자인·22졸) 아모레퍼시픽 제품디자이너본교 시각디자인과를 2022년 졸업하고 아모레퍼시픽에서 3년 차 그래픽/제품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디자이너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지 모르겠다. 편견이 가득한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부정부터 하고 싶지만 솔직히 나의 경우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나 자신이 개인주의적 성향이 너무나도 강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회사는 끝나지 않는 ‘팀플 지옥’과 같다고들 하는데, 나처럼 개인주의적 성향이 짙은 사람이 어떻게 회사에서 디자이너로서 살아가고 있는지 삶과 고민을 글로
추락의 해부(2023)‘추락의 해부’(2023)를 정성일 평론가의 해설을 곁들여 관람했다. 그의 해석을 인용한 대목에 *표시를 남겼다.개가 공을 굴린다. 공이 낙하한다. 이윽고 아버지가 추락한다. 다니엘의 절규가 이어진다. 영화는 추락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추락의 해부’(2023)는 단연 물리적인 하락만을 논하지 않는다. 겉보기에는 아버지의 죽음이 타살인가 자살인가, 어머니가 유죄인가 아닌가(gulity not guilty)를 다루는 작품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한 가정에 닥친 심리적 추락을, 그리고 그 파동에 대한 우울한 회복의 과정
가족 사회학, 생애주기 및 세대 분야의 전문가. 본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미국 에모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인간 행위와 사회 구조』, 『여자들에게 고함』, 『사랑을 읽는다』가 있고 그밖에 공저로도 다수의 책을 썼다. 세계일보, 동아일보, 이투데이 등에 칼럼을 연재해 오고 있다. 그의 ‘인간 행위와 사회구조’ 강의는 2020년 케이무크(K-MOOC) 최우수강좌로 선정되기도 했다.최근 모임에서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에겐 버려야 할 두 마리 개가 있고, 키워야 할 두 마리 양이 있다는 것이다
어느덧 스페인에 온 지 10주가 넘게 지났다. 서울과 8시간이 차이 나는 마드리드는 날씨부터 음식, 생활 방식 등 많은 것이 다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차이는 대화에 관한 것이다. 대화를 여는 방식부터 하는 이야기까지 모든 것이 낯설었다.스페인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스페인에 거주하는 인구 중 17.23%는 이민자라고 한다. 사실 스페인에 잠시라도 살아본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단골 과일 가게 사장님은 모로코인, 지금 거주하고 있는 집의 주인아주머니는 콜롬비아인, 시내 젤라토 맛집의 점원은 프랑스
책/권태(1999) 삶이 너무나 허무해 모든 일이 무용하고, 덧없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고, 그럼에도 여전히 할 일은 해야 하는 시간이 싫어진 때. 기쁘지 않아도 웃어야 했고, 쉬어가고 싶어도 쉴 수 없었다. 그대로도 좋다는 얘기나,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는 말들도 큰 위로가 되진 않았다. 치, 남의 일이니까 쉽게 말하는 거겠지.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글들은 많지 않다. 때로 글들은 지나치게 감성적이거나 지나치게 이성적이라서 독자가 자꾸만 감정을 제약하게 한다. 여기서는 슬퍼야지, 기뻐야지.
스페인어에는 ‘좋아한다’라는 동사가 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겠지만 사실이다. 대신에 Me gusta, 직역하면 ‘나에게 즐거움을 주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존재가 곧 내가 좋아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손바닥 속 화면에서 스페인어 강사는 이것이 스페인어 역구조를 이해하기에 가장 기본이 되는 단어라는 간단한 설명으로 강의를 마무리했지만, 나는 이 표현을 알게 된 이후부터 내 감정이 의심스러워져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을 머뭇거리게 되었다.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한 것이 나에게 정말 즐거움을 주는가? 좋
‘아기가 된 기분이다.’ 내가 교환학생을 오고 한 달 동안 일기장에 가장 많이 쓴 문구이다. 교환학생으로 간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중의적인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모르겠는 환경에 던져진 아기처럼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이고, 또 다른 의미는 내가 안정적이라고 생각했던 알을 깨고 다른 세상에 나와 성장하는 것을 의미한다.나는 오래전부터 미국에서 공부해 보는 것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미국에서 학생으로 생활해 보고 싶었고, 미국 교육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그렇기에
개강 주간이다. 매 학기 개강을 맞이하지만, 유독 이번 학기는 학교에 생기가 가득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마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 강의가 병행되던 시기가끝나고 상당수 교양과목과 인문대 전공과목의 강의실로 사용되는 학관이 문을 연 후 맞이한 첫 번째 3월 개강이라 그런 듯하다. 이제야 비로소 긴 코로나 시기가 끝나고 신입생을 맞이한 것만 같다.코로나 시기 동안 대학은 강의만이 아니라 학생들의 각종 대면활동들을 어떻게 원활히 진행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한 반에 배정되면 1년간 일상을 나누며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는 고등학교 시절까지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