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어에는 ‘좋아한다’라는 동사가 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겠지만 사실이다. 대신에 Me gusta, 직역하면  ‘나에게 즐거움을 주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존재가 곧 내가 좋아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손바닥 속 화면에서 스페인어 강사는 이것이 스페인어 역구조를 이해하기에 가장 기본이 되는 단어라는 간단한 설명으로 강의를 마무리했지만, 나는 이 표현을 알게 된 이후부터 내 감정이 의심스러워져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을 머뭇거리게 되었다.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한 것이 나에게 정말 즐거움을 주는가? 좋아하지만 즐겁지 않다면, 좋아하는 것이 맞을까?

 

나는 스페인을 좋아했다. 온통 꼬부라지는 그들의 언어, 쨍 내리쬐는 태양, 그 아래서 여유롭다 못해 게을러 보일 지경인 느긋한 태도까지. 하지만 애정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들은 무수했다. 그곳에서 나는 이방인이었고 내 미천한 ‘좋아함’은 자주 힘이 없었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은 지구 반대편에 있었다. 알 수 없는 외로움에 때때로 홀로 무너졌고, 다정한 칭찬에 말을 더듬지 않고 답하는 법을 몰랐다. 매일 아침 마주치는 이웃집 할아버지에게 강아지를 쓰다듬어 봐도 되냐고 물을 용기를 갖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정도였다. 

 

스페인에 온 지 두 달 정도 됐던 날, 나는 혼자 식당에 앉아 냄비에 눌어붙은 빠에야를 열심히 긁어먹고 있었다. 3시에 점심을 먹는 스페인 문화에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아 그때까지도 나는 한국에서처럼 1시쯤 식사를 했다. 그래서인지 식당 안은 유독 한적했고, 직원이 가볍게 말을 걸어 왔다. 

 

안녕, 여행 중이야? 아, 여기 사는구나. 스페인에서 지내는 건 좋아(스페인에 사는 것이 너에게 즐거움을 주니)?

 

한국을 떠나오기 전부터 망설이며 내뱉었던 표현이 등장하자 나는 멈칫했고, 직원은 내가 스페인어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같은 질문을 영어로 되풀이했다. 나는 분명히 스페인 생활을 좋아했지만, 즐겁지 않은 순간들도 있었다. 무슨 언어로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내 머릿속에서 ‘I like’와 ‘Me gusta’가 충돌하는 첫 번째 순간이었다. 한국에서부터 가지고 온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좋아하지만 즐겁지 않다면, 그래도 좋아하는 것이 맞을까?

 

사람들은 나와 달리 너무도 쉽게 좋아함을 말했고, 나는 내가 느끼는 갈등을 어떤 언어로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한국어로 좋아해, 라고 말할 때에는 그럭저럭 좋아해도 괜찮을 것 같았지만 스페인어로 내뱉게 되면 그 좋아함에 긍정적인 감정만이 존재해야 할 것만 같았다. 이 모호한 감상에서 허우적거리던 나는 무작정 아무나 붙잡고 질문을 던졌다. 너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 무엇이냐고, 그것이 너를 괴롭게 한 적도 있었느냐고. 뜻밖에도 나는 즐거움에 괴로움이 동반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영은아, 행복은 선이 아니라 점이라는 말 들어봤지? 행복은 순간이야. 즐거움은 그 과정이고. 과정에 괴로움이 동반되는 건 당연한 일이야.

 

행복은 특정 순간 성취하는 것이지만 즐거움은 행복을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느끼는 지속된 마음이므로, 모험에서 오는 고통 또한 이에 포함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필연적인 일이라는 것도.

 

누구든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생각하면, 그것이 주는 외로움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좋아해서, 오래도록 큰 마음이길 기대했으나 그 마음에 비례하듯 실망도 컸던 경험. 좋아해서 뛰어들었지만 재능의 부재를 깨닫고 좌절했던 경험. 그럼에도 좋아하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던 경험까지도. 애정을 좇는 과정이 늘 행복하지 않아도, 외로운 순간이 있더라도 지워지지 않는 즐거움이 ‘좋아하다’ 이지 않겠냐고 말이다.

 

스페인에서의 날들을 생각했다. 비행기를 놓치고, 난생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지레 겁을 먹고, 모든 일에 불안해하며 종종거렸던 경험이 잦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결코 그날들에서 즐거움을 배제할 순 없었다. 얄팍하고 허접하게만 느껴지던 날들은 거짓말처럼 애틋하게 변해 있었다. 헤매던 기억들까지 몽땅 행복으로 가는 굽이였던 것이라면, 이대로 좋았다. 그 과정만으로도 즐거웠고, 행복했던 것 같다.

 

언어는 그 나라의 문화를 먹고 자라서, 아무리 정교한 번역기도 언어가 표현하는 그 나라만의 정서를 완전히 담아내지는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문화에 익숙한 내가 느끼는 ‘좋아하다’와 스페인 문화의 ‘즐거움을 주다’는 다른 감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이 불투명한 감각을 어떤 언어로 바꾸어 불러야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통역이 필요하지 않은 순간들이 존재하듯, 개인이 느끼는 호기심과 애틋함은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누구에게나 공유될 수 있을 것이다. ‘좋아하다’라는 단어는 어쩌면 예상된 모든 고초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나아갈 만한 열정이 있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좋아한다는 말을 번역하면 용기가 남을 테다. 나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행복으로의 과정을 제시하는 이 감정을 의심할 필요는 없으니, 지레 겁먹지 말고 마음껏 좋아하면 된다고 설득할 만큼. 딱 그만큼.

 

혼잣말이라도 좋으니 꼭 대답하고 싶다. 늦은 대답이지만 나는 스페인에 지내는 걸 좋아했다고, 이제는 번역하지 않아도 좋아한다는 말을 자신있게 내뱉을 수 있다고. (Lo siento la respuesta tardía, pero quiero responder ahora. Ahora puedo decir con confianza que me gusta vivir en España. No necesitamos un traductor.)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