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권태(1999)

출처 = 교보문고
출처 = 교보문고

 

삶이 너무나 허무해 모든 일이 무용하고, 덧없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고, 그럼에도 여전히 할 일은 해야 하는 시간이 싫어진 때. 기쁘지 않아도 웃어야 했고, 쉬어가고 싶어도 쉴 수 없었다. 그대로도 좋다는 얘기나,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는 말들도 큰 위로가 되진 않았다. 치, 남의 일이니까 쉽게 말하는 거겠지.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글들은 많지 않다. 때로 글들은 지나치게 감성적이거나 지나치게 이성적이라서 독자가 자꾸만 감정을 제약하게 한다. 여기서는 슬퍼야지, 기뻐야지. 여기서는 지식을 얻어야지. 와 같이 무엇을 더 생각하고, 무엇을 더 질문할지 물어보지 않고 다만 작가가 원하는 대로 독자를 끌고 가는 것이다. 그리고 가끔은 그 일이 좋으면서도, 또 다른 어떤 날엔 그 일이 짜증 나기도 한다. 감정을 좌지우지 당하는 기분이랄까.

여기, 슬픔을 슬픔이라, 권태를 권태라 명명하고, 감정이나 감상을 요구하거나 교훈을 주려고 하지 않는 글이 있다. 때로 그의 글은 철저히 자신만을 위해 썼다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독자로서 그가 생각한 글의 뜻을 엿보고 싶을 때도 많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본인만이 아는 글자로 자신의 지식을 남겼다면, 그는 분명 모두가 읽을 수 있는 활자에 자신만의 암호를 넣어두었다. 이해할 수 없는, 철저히 자신만을 위한 문장의 나열. 이렇게 동떨어진 글은 위로가 된다.

세상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부터 어떻게 보일지,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어떻게 피해주지 않고 살아갈지 등 수없이 많은 것을 매 순간 계산하고, 또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때때로, 모두에게 동일한 결말 이후엔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하는 그것들이 너무나 무용하게 느껴져, 나 자신조차 무용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무용한 것들에 마음 쓰는 무용한 청춘. 그리고 그 시간은 참으로 덧없어진다.

그의 글은 언제나 특별하다. 그는 그런 무용한 것들에 마음을 쓰는 것 같으면서도, 그것들보다 훨씬 중요한 자신만의 무엇인가가 있어 보인다. 슬픔, 권태, 두려움 같은 감정들이 이상하게 그의 언어를 거치면 무던한 것들로 변한다. 글자 그대로. 슬픔은 슬픔이요, 권태는 권태요, 두려움은 두려움. 단어 속에 들어있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수많은 감정 대신 그의 시 속 이진법처럼 그저 0과 1로 표현되는 단어가 된다. 1100001010101100 1101010100010100, 1010110110001100 1101000011011100, 그리고 1011010001010000 1011100000100100 1100011011000000 .

무용하고 덧없는 청춘을 노래하는 그의 이름은 이상. 내가 학창 시절을 버티게 해 준 원동력 중 하나였다. 감정 그대로도 서술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글을 읽고 쓰는 새로운 방법을 알려주었다. 몇 번이고 다시 읽었던 그의 수필집 <권태> 중에서도 가장 사랑했던 두 글을 소개한다.

오랜만에 가 본 곳이 변했을 때의 기분, 어렸을 적 동무들의 안부조차 알 수 없는 현재. 그럼에도 아름다운 풍경. 생기를 잃어버린 몸의 주인과 하늘에 뜬 별자리. 동네의 불이 하나씩 꺼지는 모습, 아버지와 어머니. 돈을 벌 나이가 되었으나 여전히 돈을 벌지 못하고, 동무도, 어른도, 버릇도, 뚝심도 없어진 청춘. 상상 속의 부인과 포켓에 가득 들어있는 걱정 하나. 제목까지 어쩜, 『슬픈 이야기 – 어떤 두 주일 동안』.

『공포의 기록(초)』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나는 나의 친구들의 머리에서 나의 번지수를 지워버렸다. 아니 나의 복장까지도 말갛게 지워버렸다. 무엇이 공포일까. 잊힘이 공포인가, 혹은 내 손으로 그 모든 기록을 지워버리는 것이 공포일까.

 

무용하고 덧없는 청춘에게.

감정은 감정대로 남겨두자. 앞, 뒤, 위, 아래 어디든, 원하는 방향대로 고개를 돌리며 세상을 보자. 수없이 방황하고, 생각하자. 이전까지 느끼지 못한 새로운 감정을 느끼고, 새로운 생각을 하자. 오늘의 무용과 덧없음은 내일의 행운이 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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