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의 해부(2023)

출처=다음영화
출처=다음영화

‘추락의 해부’(2023)를 정성일 평론가의 해설을 곁들여 관람했다. 그의 해석을 인용한 대목에 *표시를 남겼다.

개가 공을 굴린다. 공이 낙하한다. 이윽고 아버지가 추락한다. 다니엘의 절규가 이어진다. 영화는 추락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추락의 해부’(2023)는 단연 물리적인 하락만을 논하지 않는다. 겉보기에는 아버지의 죽음이 타살인가 자살인가, 어머니가 유죄인가 아닌가(gulity not guilty)를 다루는 작품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한 가정에 닥친 심리적 추락을, 그리고 그 파동에 대한 우울한 회복의 과정을 담는다.

따라서 어머니의 범행 여부를 확인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며칠간 이어지는 법정의 공방이 다니엘에게 알려주는 부모님의 사정, 그리고 그가 부모님의 비밀을 이해의 체로 거르는 과정이 중요하다. 다니엘이 겪은 심리의 격동을 추적하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를 만나게 될 것이다.

정성일 평론가는 이렇게 말한다. “*법정이라는 현재 앞에서 과거의 사건을 법의 힘을 빌려 미래로부터 찾아온다는 시제, 이 영화는 법의 시제를 보인다.” 법은 객관성의 대표 격인 텍스트이며, 법정에서 양측의 공방이 시작되는 순간 주관적 판단이 개입될지라도 판결만은 이성과 논리의 산물임이 틀림없다. 다니엘이 부모님의 사정을 듣고 자신만의 판결(용서)을 내리기에 법정은 가장 훌륭한 수단인 것이다. 시제를 넘나들며 찾아오는 부모님의 잘못이 다니엘을 후벼 파도 다니엘은 상처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판결을 완성함으로써 치유한다. 

다니엘은 시각장애인이다. 법정의 소리는 그의 머릿속에서 이미지로 재구성된다. 상상이 자극한 뇌와 그에 수반된 자율신경계의 반응이 생생히 영상화되어 관객에게 찾아간다. 특히 증거물(녹음)을 재생하는 과정에서 부모님의 격양된 싸움과 그들의 심적 통증이 상영된다. 관객에게도 가치판단의 역할이 부여되는 순간이다. 관객은 배심원이, 넓게는 재판을 보도하는 뉴스의 시청자(대중)로 바뀐다. 이것이 대부분의 관객이 다음과 같은 의문을 남기는 이유이다.

‘그래서, 죽인 게 맞아, 아니야?’

평론의 첫 부분으로 돌아왔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공이 과연 자유의지로 낙하했겠느냐는 말을 남길 수 있으나, 이것은 영화의 심지에서 멀어진다. 다니엘이 ‘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해 어머니의 말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진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가족의 신뢰가 유일한 과제인 것이다.

다니엘이 믿기로 결심한 어머니의 진술에는 사실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여태껏 불어로 진술하던 중, 어머니(독일인)는 특정 대목에서 말(프랑스어)이 유달리 복잡하지 않아도 영어를 고집한다. 그가 모국어가 아닌 영어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프랑스 법정에서 영어를 허락받고 의도적으로 말의 거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법정은 공방의 연속이며 언어 이외에 개인의 공간을 확보할 기회가 없다. 그러한 방어가 산드라의 전술이다. *산드라는 언어의 중성적 자리로 후퇴하고, 그 틈 사이에 의도를 숨겼다. *번역어의 이데올로기라는 말이 있다. 언어에는 교집합이 있을 뿐 상이한 언어는 서로 완전히 일치할 수 없다. 번역할 수 없는 틈이 생기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으로 가보자. 승소하고 집에 돌아온 산드라는 다니엘에게 법정에서처럼 영어로 말을 건넨다. *그러나 다니엘은 불어에 더 친숙하다. (부친의 시체를 발견한 위급한 순간에 불어로 어머니를 불렀다-maman!) *산드라는 자신의 말조차도 믿지 못하는 상태에 빠진 것이다. 그가 법 앞에서는 무죄이지만 다니엘 앞에서는 아직 유죄이기 때문이다. (대사 “엄마는 집에 오는 것이 겁났어”를 통해 용서받지 못할 것이 겁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영화의 끝자락에서, 어머니는 홀로 고독한 시간을 보낸다. 맹인 안내견 스눕은 어머니에게 필요한 것을 인지하고 옆으로 다가간다. *산드라는 앞이 깜깜하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용서받지 못하는 보호자가 되었다.

이렇게 믿음과 진실의 상관관계가, 무죄 선고를 받기보다 추락한 신뢰를 끌어올리기가 더 어렵다는 막막한 깨달음이 ‘추락의 해부’(2023)를 관통한다. 철학자 안셀무스의 말을 끝으로 이야기를 맺고자 한다.

나는 믿기 위해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 (Anselmus Cantuarien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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