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에 마음을 쏟는 것. 마음을 쏟기 시작하면, 그에 대한 세계가 확장되고 그 펼쳐진 세계 속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인지하게 된다.

나는 마음의 한 켠을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다. 쉽게 말해, 그냥 정이 많다. 정도 많고 정을 주는 것도 좋아한다. 비록 마음이 자리잡기까지는 더딘 편이지만 지속력은 길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사물이든 무엇이던 간에 한번 마음을 붙이기 시작하면 온기가 도는 느낌을 받고는 하는데, 그 온기는 나의 많은 부분들에 영향을 미친다.

최근 나는 공간으로부터 받는 많은 감정들을 경험했다. 새삼스럽게,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생각되는 ‘공간’으로부터 구체적인 감정들을 마주하니, 마음이 정착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건 참 소중하다고 느낀다.

2023년 한 해 동안만 주거지를 두 번이나 옮겼다. 정말 정확히는, 상반기 동안 세 군데에서 살아보는 경험을 한 것이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이사 경험이 인생 통틀어 한 번 뿐이었기에, 단기간의 두 번의 이사 경험은 굉장히 파격적인 이벤트였다. 여러 집, 각기 다른 공간에서 생활하며 느낀 생각들을 뒤돌아 다시 꺼내어 살펴보니 나는 공간에도 마음을 쏟고 싶어 하는 성향을 가졌다는 걸 깨닫는다.

첫 번째 집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 보자면, 초등학생 때부터 스물한 살 초반까지 대략 13년을 살았던 첫 번째 집을 곧 떠나야 한다고 들었을 때, 새로운 집은 어떤 모습일까 머릿속에 상상을 펼치며 기대감에 사로잡혔다. 살던 집은 꽤 오래되어 벽지가 갈라지거나 타일 틈이 벌어지는 등 손을 봐야 하는 곳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더 이상 수리할 필요가 없는 곳으로 떠날 수 있다니, 후련하면서도 개운한 마음이었다.

그렇지만 10년이 넘는 흔적이 가득한 내 방을 다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섭섭한 마음이 한가득이었던 건 사실이다. 구조상 집의 가장 끝에 위치해 있어 겨울에는 정말 추웠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지하철 정차 소리가 꽤 크게 들려 조건상 제일 좋지 않은 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다양한 모습의 나를 보듬는 마음을 낼 수 있게 해준 공간이었다. 공부에 집중도가 떨어질 때면 계속해서 책상의 위치를 바꿔도 보고,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이 우르르 놀러 와 그 좁은 방 안에서 쪼그려 앉아 수다를 나누다가 잠들기도 했다. 새벽까지 깨어 있는 걸 가족들한테 들킬 수 없어 모기를 방 안에 가둔 채 같이 잠을 청한 기억도 난다. 차곡차곡 쌓아 둔 추억이 녹아 있는 공간이다 보니 차마 쉽게 짐을 정리할 수 없었다. 이사를 준비하며 벽에 붙어있는 사진들을 뗄 때, 가져갈 수 없어 처분하기로 한 음이 다 떨어진 거대한 피아노가 눈앞에서 단 1분 만에 분해될 때의 섭섭함은 아직도 잊을 수 없이 생생하다. 분명 떠날 때 방 사진을 몇 번이나 찍었던 것 같다.

그렇게 이사한 두 번째 집은 첫 번째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빌라였다. 최종적으로 갈 세 번째 집에 들어가기 전, 두 달만 살면 되는 곳이었다. 내가 쓸 방의 크기가 확연히 작아졌지만, 그리 중요치 않았다. 오히려 아늑한 나만의 아지트 같은 공간이 될 것 같아 이전 집에 대한 미련이 수그러들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치 못한 요소들이 기대감에 차 있던 나의 마음을 한순간에 흐트러뜨렸다. 주원인은 바로 빗방울 소리였다. 여름이 되고 장마철이 찾아오며 낮과 밤으로 폭우가 내리던 시기였다. 나의 방은 본래 발코니로 설계된 자리가 안방의 확장부분으로 연결되며 슬라이브 지붕이 천장의 역할을 대신했다. 밖에서 보면 베란다처럼 툭 튀어나온, 다용도실처럼 쓰일 것만 같은 공간에 내 책상과 책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유난히 길었던 지독한 장마철의 굵은 빗방울들은 개조된 얇은 천장을 계속해서 때렸다. 분명 실내에 있음에도, 세차게 쏟아지는 빗속에서 우산만 쓰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필이면 민감한 청력을 가진 나에게 빗소리는 한순간에 소음이 돼 버렸다. 덕분에 처음으로 집이 싫어서 울기도 하고 밤에 카페로 피신을 가는 다이나믹하고 특별한 경험도 해보았다. 가장 편안해야 할 공간에 마음이 붕 떠 있으니, 귀중한 걸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딱 두 달만 버티자는 마음으로 최대한 일찍 외출해 밤늦게 귀가하던 나날들이었다.

긴 두 달을 지나 이사 온 현재 살고 있는 세번째 집은 생활하는 데에 큰 무리는 없다. 다만 손때 묻지 않은 새로운 가구, 물건들은 집을 무심하게 여기게 하는 것 같다. 아직 추억이 없으니 각별한 정이 생기지 않는 건 당연하다. 그나마 내가 쓰는 방에는 내가 원하는 대로 가구들을 여러 번 재배치하기도 하고, 직접 구입하기도 하며 마음을 붙여가는 중이다. 더 솔직하게 말해보자면 마음 붙이기를 노력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매일 고만고만한 움직임이 이루어지는 공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한번 마음을 기울이게 되면, 그로써 비슷한 감정들을 선사하는 환경들의 공통점들을 발견하게 되면, 나의 생각과 세계는 또 한번 확장된다. 그렇게 작년의 경험들은 나의 마음에 새로운 방을 열게 만든 것 같다.

또 새롭게 경험할 공간들과 누군가의 고유한 공간 세계가 궁금해지는 요즘이다.

키워드

#여론광장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