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 사회학과 교수

 

가족 사회학, 생애주기 및 세대 분야의 전문가. 본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미국 에모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인간 행위와 사회 구조』, 『여자들에게 고함』, 『사랑을 읽는다』가 있고 그밖에 공저로도 다수의 책을 썼다. 세계일보, 동아일보, 이투데이 등에 칼럼을 연재해 오고 있다. 그의 ‘인간 행위와 사회구조’ 강의는 2020년 케이무크(K-MOOC) 최우수강좌로 선정되기도 했다.

최근 모임에서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에겐 버려야 할 두 마리 개가 있고, 키워야 할 두 마리 양이 있다는 것이다. 버려야 할 두 마리 개(犬)는 바로 편‘견’과 선입‘견’이요, 키워야 할 두 마리 양(未)은 재‘미’와 의‘미’란다. 뜻은 다르지만 발음이 같은 한자를 활용한 유머에서 재치가 느껴진다.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도록 도와주고, 재미와 의미를 더해줌이 바로 책 읽기의 진수 아니겠는지.

돌아보니 내가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 세상을 더욱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개안(開眼)의 기쁨을 주었던 책은 셀 수 없이 많다. ‘피는 속여도 전공은 못 속인다’는 명언(?)답게, 사회학책은 우리가 당연시해 온 통념이나 상식을 보란 듯이 뒤집는 멋짐을 장착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굳이 전공책이 아니어도 최근 편견과 선입견을 다시금 환기하게 시켜 준 책이 있다. ‘나의 사랑스럽고 불평등한 코스모스’(찬다 프레스코드와인스타인) 덕분에, 흑인 에이젠더 여성 물리학자가 포착한 “사랑스럽기 그 지없는 우주” 속에서, 과학의 이름 아래 가려 져 온 두터운 인종차별주의의 실체와 여전히 뿌리 깊은 성차별주의의 위력을 실감했다. 기술 낙관론의 유혹을 말끔히 떨쳐버릴 수 있었던 ‘권력과 진보’(대런 아세모글루·사이먼 존슨) 덕분이었다. 뒤이어 ‘Atlas of AI’(케이트 프로포드)를 읽고 나니, 인공지능이란 인공적이지도 지능적이지도 않다는 ‘현타’와 함께, 우리를 강타한 생성형 인공지능 앞에서 과도한 공포도 금물이지만 과다한 기대도 금기이어야 함을 새삼 깨달았다.

책 읽기의 재미와 의미를 확신하며 한 주에 한 권 읽기를 기본으로 대학원생을 위한 강의 계획안을 구성한다. 학기를 끝내며 “이제야 내가 공부란 걸 제대로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찍이 책의 진가를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박사 과정도 끝나가는 지금 너무 후회스럽다…”, 학생들이 남긴 이런 후기를 보며 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에 안도한다. 요즘 세대는 드라마도 ‘짤’로 보고 3분 내외의 숏폼 동영상을 즐기며 책도 축약본이나 요약본을 선호한다지만, 이 또한 과도한 일반화임을 교실에서 실감할 때가 종종 있다.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을 선택해서 소설도 읽고 영 화도 함께 감상한 후 비교 분석해보라는 과제를 주면 10명 중 8명은 소설적 상상력의 매력에 손을 들어준다.

영화는 주연배우의 얼굴이 소설 속 주인공을 향한 무한대의 환상을 보기 좋게 깰 때가 많다. 그뿐 아니라 소설이 깊고 다양한 주제를 정교하게 잘 짜인 플롯에 담아내는 데 반해, 영화는 상영시간의 제한으로 인한 선택과 집중을 명분으로, 원작의 풍성한 잎과 절묘한 가지와 끝 간 데 없이 뻗어나가는 뿌리를 놓치곤 한다는 것이다. 아날로그적 감성이 세대를 뛰어넘어 공감하고 공명할 때의 기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리오.

문자보다는 동영상에 노출될 기회가 많아진 세대로부터 좋은 책 고르는 법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영화도 끊임없이 보다 보면 완성도 높은 예술 영화인지 대중의 말초신경에 호소하는 영화인지 구분할 수 있듯이, 책도 자꾸 만져보고 읽어 봐야 ‘너만의’ 안목이 생긴다고 말해준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처럼 자꾸 보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운 마음이 이는 ‘너’처럼. 책도 물론 그렇다.

예전에는 일단 책을 집어 들면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한 권에 집중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요즘의 나는 서너 권의 책을 동 시에 읽는 신세대다운 습관이 생겼다. 책상에 똑바로 앉아 읽는 책, 잠자기 전 읽는 책, 화장 실에서 읽는 책, 기차 안에서 읽는 책 등등. 그러고 보니 요즘 읽은 책으론 ‘내 집에 갇힌 사회’, ‘특권 중산층’ 같은 전공 서적도 있고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에 이름 붙이기’, ‘암컷들’처럼 나의 흥미를 무한대로 끌어 올린 책도 있고 ‘H마트에서 울다’, ‘Paradise’ 같은 감동적 소설과 에세이도 포함돼 있다.

오래전 내 꿈은 ‘은퇴하면 시냇물에 발 담그고 쌓아둔 책을 읽으리’였다. 당시는 취직도 못 한 실업자가 은퇴를 꿈꾼다고 놀림을 받기 일쑤였고, 60세 넘으면 노안에 시력도 떨어져 책 읽기는 사치가 될 거라는 경고도 받았다. 한데 인생은 반전의 연속 아니던가. 구사일생 교수가 되어 30년 가까이 봉직한 끝에 올해 8 월이면 학교를 떠나는데, 10년 가까이 생블루베리를 장복했더니 눈이 맑아지고 피로감도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마침내 꿈을 이룬 여자가 될 그날이 은근히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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