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우리는 세상에 태어나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을 마주하며 삶의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이대학보는 10대부터 70대까지, 저마다의 성실함을 담아 시간을 달리는 여성들의 삶을 담았다. 각 세대별 여성이 지니고 있는 고민과 그들이 마주한 변화에 대해 들어봤다. 중·고등학생, 대학생, 사회 초년생, 중년 비혼·기혼 여성, 노년 여성의 이야기를 10월30일부터 5주간 연재한다. 

 

“네가 어떻게 완전할 수 있니? 칠십 넘은 나도 완전하지 않은데.”

74세를 맞이한 윤영주(불문·05년졸)씨가 인생 후배들에게 건네는 말이다. “완벽하면 오히려 재미없다”는 윤씨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요즘 젊은 세대에게 “부담 없이 살아도 된다”고 말한다. 칠십이 넘어 꿈을 펼친 그는 MBN 시니어 모델 서바이벌 ‘오래살고볼일’(2020)에서 우승하며 런웨이를 걷기 시작했다. 윤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 2월 ‘칠십에 걷기 시작했습니다’라는 책을 출간했고, 이는 2023 문학나눔 선정도서로 지정돼 전국 도서관에 배치됐다. 그 시절 7080세대의 치열했던 결혼, 육아, 경제 활동을 지나 비로소 70세에 꿈을 찾은 그를 만났다. 

 

74세를 맞이한 윤영주씨는 “지금껏 살아온 경험으로 더 깊은 사고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나이드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strong>안정연 사진기자
74세를 맞이한 윤영주씨는 “지금껏 살아온 경험으로 더 깊은 사고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나이드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안정연 사진기자

 

일흔넷의 윤영주를 이루는 것들

윤씨에게 나이 드는 건 좋은 일이다. “젊었을 때에 비해 주름도 많고 예쁘진 않지만, 지금껏 살아온 경험으로 더 깊은 사고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가 나이 들어감에 따라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건 당연했다. 윤씨는 철학자 하이데거의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이미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말을 인용하며 “죽음을 떠올리면 유한한 삶을 더 열심히 살아가야겠다는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윤씨는 하이데거의 말을 되새기며 더 이상 죽음이 다가오는 걸 불안해하지 않게 됐다. 

“나이가 들면 어쩔 수 없이 사회 속에서 소외자가 돼요.” 나이 드는 것이 기쁘다던 윤씨도 사회에서 멀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은 순간이 있었다. 윤씨는 음악사 강연을 듣고자 찾아간 행사장 입구에서 “어떻게 오셨냐”는 말을 들었다. 윤씨에게 직원의 말은 “나이 든 사람이 이곳에 왜 왔냐”는 의미로 느껴졌다. 행사장 앞에서는 검표와 예약 확인을 거쳐 입장객을 통과시키는 게 일반적이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씨는 소외자가 되지 않기 위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젊은 세대가 어떤 분야에 관심이 많은지 꾸준히 주의를 기울이고, 그들과 함께하려 한다. 윤씨는 “20대, 30대에게 나도 70대로서 21세기에, 같은 환경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OTT 서비스로 유행하는 최신 콘텐츠를 접하고, 인스타그램에 사진과 숏폼을 활발히 올리고 있다. 꾸준한 노력 덕에 그는 인스타그램 팔로워 1.4만을 이끄는 인플루언서로 활동 중이다. 

그가 살아갈 힘을 얻는 원동력은 운동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건강을 소홀히 해선 안 되는 나이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20대 이후로 운동을 쉬어본 적 없는 그는 현재 셔플 댄스, 필라테스, 심신 수련법인 국선도 등 다양한 운동을 취미로 삼는다. 운동은 단순히 건강뿐 아니라 모델 일을 할 때도 도움이 된다. “춤추고 운동을 하니까 몸을 움직이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아요.”

 

모진 인생의 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1970년, 윤씨는 졸업을 두 학기 남기고 제적당했다. 결혼하면 학교를 다닐 수 없다는 금혼 학칙 때문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오빠 친구와 22살에 결혼하며 학교를 떠났다. 그가 이른 나이에 결혼을 결심한 건 빠르게 독립을 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됐다. 막내딸이던 윤씨는 집안에서 다른 오빠들과 차별적 대우를 받았다. “아들만 좋아하는 우리 엄마랑 한 집에서 살고 싶지 않았어요.”

독립하고 싶은 마음에 서두른 결혼은 윤씨를 34대 종손 며느리로 만들었다. “결혼하고 처음 했던 게 1년에 13번 제사 지내는 거였어요.” 그렇게 윤씨는 결혼 후 종손 며느리로,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로 40년을 살아왔다. 결혼 자체를 후회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을 낳고 안락한 가정을 꾸리는 것에서 오는 행복과 보람이 컸기 때문이다. 다만 너무 이른 결혼 시기에 대해 아쉬움을 내비쳤다. “다시 돌아가도 결혼할 것 같아요. 그렇지만 20대 공부할 거 다 하고 30대 넘어서 할 거예요.”

‘아내’와 ‘엄마’로 사는 동안에도 꿈은 가득했다. 윤씨는 디자이너, 방송국 리포터로 살아가고 싶었지만 “아기나 돌볼 것이지 뭐 하러 그런 일을 하냐”는 남편의 말에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 15년 차가 넘었을 당시, 어려워진 집안 사정에 도움이 되고자 스포츠용품 대리점을 차려 일을 시작했다. 그는 금혼 학칙으로 제적당해 학사가 없었고, 결혼 이후 일을 지속하지 못했기에 전문직을 갖기는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윤씨가 택할 수 있는 경제 활동은 장사뿐이었다. 당시 윤씨는 사람들 앞에 나서서 장사를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장사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건 오직 아이들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있으니까 내가 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스포츠용품 대리점을 운영하던 윤씨는 2003년, 본교의 연락을 받았다. 금혼 학칙이 없어졌으니 다시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연락이었다. 그렇게 윤씨는 33년 만에 교정을 밟았다. 20대 후배들 사이에서 몇십 년간 쉬었던 불문학을 다시 공부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수업을 잘 따라가고 싶은 마음에 불어에 능통한 지인에게 반년간 과외를 받기도 했다. 어려운 건 전공과목만이 아니었다. 30년 동안 대학의 많은 것이 달라져 수강신청부터 팀플까지, 컴퓨터를 활용해야만 했다. “미술 수업에서 컴퓨터를 쓰는 그룹 활동을 하는데, 누가 나랑 같이 하고 싶겠어요.” 컴퓨터를 잘 사용하지 못해 대학에서 혼자가 된 윤씨에게 공대 학생이 나타났다. “선배님, 어려운 거 있으시면 제가 다 도와드릴게요.” 이에 윤씨는 “컴퓨터 좀 알려달라”며 “우리 집으로 와서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졸업을 앞두고 어떻게 하면 공부를 더 많이 할 수 있을지 고민한 윤씨는 컴퓨터를 가르쳐줬던 공대 학생에게 “남편에게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상담을 했다. 그 학생은 “여태껏 남편이 원하는 대로 선배님이 다 했으니까 이젠 선배님이 원하는 대로 공부하라”고 답했다. 조언을 듣고 용기를 낸 윤씨는 남편에게 “대학원 가겠다”는 결심을 전했다. 윤씨가 결혼 생활 중 남편에게 처음으로 확고하게 의사 표현을 한 순간이었다. 남편은 윤씨의 말을 듣고 대학원 진학에 찬성했다. 미학 공부를 어릴 적부터 꿈꾸던 그는 50대 후반, 홍익대 대학원에 진학해 미학 석·박사를 취득했다. 금혼 학칙으로 22살에 이화를 떠난 그는 33년 만에 다시 학부생으로 돌아와 공부를 시작했고, 64살에 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치열했던 결혼, 육아, 경제 활동을 지나 비로소 70세에 꿈을 찾은 윤영주씨. 그는 현재 시니어 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strong>안정연 사진기자
치열했던 결혼, 육아, 경제 활동을 지나 비로소 70세에 꿈을 찾은 윤영주씨. 그는 현재 시니어 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안정연 사진기자

 

두 번째 청춘, 일흔

“움직이십시오. 저지르십시오.”

윤씨는 젊은 사람들에게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저지르라”고 조언했다. 인생의 모험을 앞뒀을 때 겁내지만 말고 시도하라는 뜻이다. 윤씨는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젊은 사람들에게 도전을 꾸준히 권하고 있는 윤씨는 끊임없이 모험을 ‘저지르고’ 있다. 시니어 모델로서 아티스트, 인플루언서 등을 전담하는 회사 ‘스피커’에 소속된 윤씨는 ‘In her closet’(인허클로젯)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진행하고 있다. 다시 리포터로 일하고 싶었지만 시기가 너무 늦어 포기했던 윤씨는 유튜브 채널의 진행자로 활동하며 마침내 그 꿈을 실현 중이다.

74세를 맞이한 그는 “세상을 떠난 뒤 사람들에게 ‘겉으론 강해 보였어도 속이 참 따뜻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윤씨의 아들은 그를 휴대폰에 ‘단여사’라고 저장했다. 뭐든지 단호하게 결정 내리는 윤씨의 성격을 나타낸 별명이다. 하지만 윤씨 스스로 생각한 자신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 “난 판단을 빨리빨리 해요. 이게 냉정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사실 난 그렇지 않거든. 연약하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우리 가족이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가족에게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윤씨의 마음은 ‘사랑을 추구하는 자세’에서 비롯됐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사랑은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윤씨는 “할머니가 됐어도 마음만은 젊었을 때와 똑같다”며 “할머니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제 인생의 화양연화는 바로 지금이에요. 무엇인가 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어요. 예전엔 뭔가를 하고 싶어도 가족과 사회제도에 얽매여서 제재를 당했죠. 근데 지금은 내가 하고 싶은 걸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젊었을 때처럼 예쁘고 체력이 좋지도 않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걸 맘껏 할 수 있는 지금이 화양연화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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