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우리는 세상에 태어나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을 마주하며 삶의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이대학보는 10대부터 70대까지, 저마다의 성실함을 담아 시간을 달리는 여성들의 삶을 담았다. 각 세대별 여성이 지니고 있는 고민과 그들이 마주한 변화에 대해 들어봤다. 중·고등학생, 대학생, 사회 초년생, 중년 비혼·기혼 여성, 노년 여성의 이야기를 10월30일부터 5주간 연재한다. 

직업, 성별, 세대. 우리는 최소 한 가지 이상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간다. 그중 결혼은 한 사람의 배우자, 부모라는 정체성을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이대학보는 결혼으로 발생하는 삶의 변화와 그 과정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고민을 듣기 위해 결혼 30년차 배윤성(행정∙91년졸)씨를 만났다. 그는 24년 동안 평범한 주부로 살아오다 지난 8월, 30년간의 결혼 생활을 담은 ‘결혼들은 왜 이럴까’라는 책을 출간했다. 

배윤성씨가 자신의 결혼 생활 에피소드를 담은 책 ‘결혼들은 왜 이럴까’를 들고 있다. <strong>이승현 사진기자
배윤성씨가 자신의 결혼 생활 에피소드를 담은 책 ‘결혼들은 왜 이럴까’를 들고 있다. 이승현 사진기자

나보다 엄마, 아내, 며느리

대학교 1학년, 배씨는 가을 엠티에서 남편을 처음 만났다. 같은 장소로 엠티를 온 다른 학교 학생이던 남편과 밤새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갔고 연애를 시작했다. 6년의 연애 기간 동안 남편은 ‘결혼’이라는 최종 목표를 가지고 배씨에게 최선을 다했다. 만날 때마다 빨간 장미를 한 아름 사오고, 점심을 굶어가며 아르바이트하며 모은 돈으로 매번 비싼 음식을 사줬다. 배씨는 26살이 되던 해 남편과 결혼했다. 

결혼 준비 과정은 가시밭길이었다. 시어머니는 첫 만남에 “혼인은 허락하겠지만 보탤 돈은 없다”며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렸을 때 이혼하신 것이냐”는 말을 던졌다. 이혼 가정이지만 안락하고 따뜻한 환경에서 살아온 배씨로서는 처음 듣는 말들이었다. 시댁 식구를 만난 후 충격받은 배씨는 결국 파혼을 통보했지만, 눈물을 흘리며 붙잡는 남편에 마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결혼 생활은 첩첩산중이었다. 결혼 후 배씨는 홀로 육아와 시집살이를 견뎌야 했다. 장남의 며느리로 살며 배씨는 “남편이 아닌 남편 가족과 결혼한 것 같다”고 느꼈다. 배씨는 일년 내내 이어지는 각종 제사와 쉴 틈 없는 시어머니의 잔소리를 온전히 감내해야 했다. 

좋은 엄마가 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딸, 학생, 아내, 며느리 등 다양한 역할 중에서도 제일 후회가 많이 남는 게 엄마의 역할이에요.” 배씨는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그 아이는 내 분신이자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라며 “걱정되는 마음에 아이들을 지나치게 통제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부모의 역할이 아이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좋은 엄마의 자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던 건 딸의 홈스쿨링을 도우며 딸과 오랜 시간 함께 생활했을 때부터였다. 많은 대화를 통해 생각을 나누며 딸이 자신과는 다른 독립된 존재임을 깨닫게 됐고,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생각과 감정이 나오게 됐는지 이해하려 했다. 자식을 분신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 대하는 자세를 기르게 된 것이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기에, 엄마의 자질을 배워갔다. 

엄마의 가슴 뛰던 청춘

엄마, 며느리, 아내의 이름으로 30년 동안 살아왔던 배씨에게도 가슴 뛰는 꿈은 있었다. 대학 시절 <이대학보> 42기 기자로 일하며 신문사 기자가 되겠다는 막연한 꿈을 가졌다. 대학 졸업 후 기자의 꿈을 이루고자 <한국일보>에서 맞춤법과 틀린 문장을 고치는 교열 기자로 일하기도 하고 <금융증권일보> 취재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기자로 일하며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 재밌었다”고 말했다.

기자로 일하던 중 결혼을 했고, 임신 후에는 기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입덧이 너무 심해 회사에 있는 내내 화장실에서 속을 달래야 했기 때문이다. 실내에서 상사들이 피는 줄담배는 그가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고통받게 했다. “회사에서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인데 계속 다니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었어요.” 결국 그는 언론사를 그만두고 연년생 자녀를 낳으면서 독박 육아를 시작했다. 배씨는 “몇 년 동안 홀로 육아하며 신문사에 다시 취업할 시기를 다 놓쳤다”며 “이제 다시 사회로 돌아가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 젊은 시절 상상하던 어른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릴 적 막연히 미래를 상상하던 배씨는 많은 자원을 누리며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을 떠올리곤 했다. 하지만 현재 그의 모습은 꿈꾸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럼에도 배씨는 “어릴 적 꿈꿨던 모습과 지금 모습 중 뭐가 더 좋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고 말했다. “어렸을 땐 피상적으로 미래 모습을 상상했던 것이고, 지금은 오히려 현실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꾸려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중턱에서 꿈을 찾는 일 

배씨는 나이 들어가는 과정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물론 하루가 다르게 몸이 약해지는 걸 느끼지만 젊은 시절보다 시간을 소중하게 쓰고 있는 점에서 좋아요.” 자식들이 독립한 직후, 여느 때처럼 집안일이나 동네 지인들을 만나 담소를 나누는 것만 반복하던 삶을 살던 중 문득 “이렇게만 살다가 세상을 떠난다면 너무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배씨의 뇌리를 스쳤다. 그 후 운동, 요리 등 다양한 도전을 하던 배씨는 대학 시절부터 꿈꾸던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티비엔(tvN)에서 방영한 ‘미스터 션샤인’(2018)을 보면서부터다. “갑자기 ‘미스터 션샤인’을 보면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컴퓨터 앞에 앉아 단숨에 A4 몇십 장에 달하는 소설을 써 내려간 그는 본격적인 소설 공부를 결심했다. 배씨는 한겨레 문화센터 수필반에 등록해 생애 처음 여러 편의 수필을 써보면서 자신이 “할 말이 정말 많은 수다쟁이 같은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그때부터 배씨는 매일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아기를 낳다가 진통 때문에 기절할 뻔한 일, 남편이랑 설거지를 서로 미루다가 싸운 일, 시어머니에게 혼나고 펑펑 울었던 일 등 결혼 생활을 하면서 있었던 일들을 에세이로 써냈다. 이 모든 이야기가 묶여 ‘결혼들은 왜 이럴까’라는 책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됐다.

주위 사람들은 50대 중반에 글쓰기를 시작한 그에게 “지금 글쓰기 해서 뭐 하냐”고 만류하기도 했다. 가족들은 “매일 컴퓨터를 봐서 시력도 더 안 좋아지는데 아직까지 글을 쓰고 있냐”는 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끈기를 원동력 삼았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 글을 쓴 게 아니었다”며 “지금 내가 글을 쓰는 게 즐겁기 때문에 힘이 닿는 데까지 매일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그는 “건강 유지를 잘해서 하고 싶은 일들을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20대 중반에 결혼하고, 시댁과 육아에 젊은 시절의 힘을 다 쏟아부었던 배씨는 50대 중반이 돼서야 비로소 꿈을 찾고 새로운 행복을 발견한 것이다. 

평범한 주부의 삶을 이어오던 배윤성씨는 50대 중반에 글쓰기를 시작하여 현재 작가로 활동하며 자신의 꿈을 이어나가고 있다. <strong>이승현 사진기자
평범한 주부의 삶을 이어오던 배윤성씨는 50대 중반에 글쓰기를 시작하여 현재 작가로 활동하며 자신의 꿈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승현 사진기자

제 삶의 화양연화는 <금융증권일보> 증권부 기자 생활을 했던 시절인 것 같아요. 그때 데스크 선배 중에 이대 물리학과 출신 선배가 있었거든요. 그곳에서 동년배 기자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조명해볼 수 있다는 게 큰 보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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