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이대학보는 10월30일부터 5주간 ‘시간을 달리는 여자들’을 연재했다. ‘시간을 달리는 여자들’의 주인공으로서 각 세대를 대표했던 여성들이 한자리에 모여 좌담회를 가졌다. 세대별 여성들이 다른 세대 여성들에게 조언을 건네기도 하고 고민 상담을 하기도 했다. 

과거 얘기를 나누다 웃음을 터뜨리는 70대 대표 윤영주씨(왼쪽)와 경청하고 있는 20대 대표 정민정씨. <strong>이자빈 사진기자
과거 얘기를 나누다 웃음을 터뜨리는 70대 대표 윤영주씨(왼쪽)와 경청하고 있는 20대 대표 정민정씨. 이자빈 사진기자

세월이 지나면서 한 사람이 지닌 생각과 관심사는 변화한다. 이대학보는 ‘시간을 달리는 여성들’을 통해 10대부터 70대까지 여성의 이야기를 들어보며, 한 여성이 삶을 살며 어떠한 변화를 마주하는지 파악했다. 10대 박서진씨, 20대 정민정씨, 50대 배윤성씨, 70대 윤영주씨를 한자리에서 만났다. 이번 좌담회에는 올해 새롭게 단장된 학관을 처음 마주해 설렘을 숨기지 못하는 이들부터, 야간자율학습을 앞둔 채 교복을 입고 온 고등학생이 참석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정말 늦은 건지, 아니면 가장 빠른 건지

서진(10대): 지금까지 살면서 크게 늦었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다. 고등학생이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늦었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위기를 느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장 늦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인터넷에서 본 짧은 영상이 생각난다. ‘무한도전’(2006)에서 유재석이 “진짜 위기는 위기라는 걸 인지했음에도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때”라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늦었다는 생각으로 위기를 느꼈을 때 걱정만 하지 말고 어떤 일이든 도전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민정(20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제일 빠르다고 생각한다. 전문직 시험 준비를 하느라 취업 준비를 늦게 했다. (내가 첫 취업에 도전할 당시에는) 현역으로 대학을 입학하고 나서 휴학 없이 바로 취업하는 친구들은 23살 정도에 취업했다. 그러나 여러 진로를 탐색하다가 25살 11월에 첫 직장을 들어갔다. 당시엔 주변과 비교하며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지만, 20대 후반이 된 지금 돌아보니 25살은 너무 어린 나이다. 이걸 깨달은 뒤부터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제일 빠른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시기가 너무 늦었는지, 빨랐는지 고민하는 것부터가 이미 그 일을 할 만한 준비가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늦었다고 생각되면 우선 시도부터 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영주(70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정말’ 늦은 건 아니다. 그렇지만 ‘가장’ 빠른 것도 아니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공부를 늦게 시작했기 때문이다. 34대 종손 며느리로 평생 제사를 지내고 시댁 식구들을 모셨다. 결혼 생활에도 공부에 관한 욕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2003년, 이대에서 다시 공부하러 오라고 연락 왔을 때부터 10년 이상을 쭉 공부했다. 미학으로 석·박사를 취득했는데, 미학은 곧 철학이다. 철학은 곧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라서 나이가 든 내가 더 잘할 수 있었다.

 

 

윤성(50대): 윤영주 선배님의 결혼 생활과 내 결혼 생활이 비슷한 것 같다. 25년 동안 정신없이 엄마, 아내, 며느리로 지내다가 50살이 됐는데 ‘내가 지금까지 뭘 하면서 살아왔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25년이 공백기처럼 느껴졌다. 그러다 우연히 6년 전쯤 독서 모임에 들어가게 됐고 2년 동안 많은 책을 읽었다.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결혼들은 왜 이럴까’라는 에세이를 8월에 출간했고 소설 공부도 4년간 하고 있다. 50살에 소설을 쓰겠다고 했을 때 가족들에게 “국어국문학과나 문예창작과를 나온 것도 아닌데 어떻게 글을 쓰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더니 작가로서 이 자리에도 앉아 있을 수 있게 됐다. 늦었다는 생각에 망설였다면 지금처럼 되지 못했을 것이다.

 

박서진씨의 이야기에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배윤성씨, 윤영주씨(왼쪽부터). <strong>이승현 사진기자
박서진씨의 이야기에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배윤성씨, 윤영주씨(왼쪽부터). 이승현 사진기자

 

현재 가장 두려운 것은

서진(10대): 지칠 것 같아 두렵다. 지금은 당장 해야 할 일이 명확하기 때문에 불명확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까지는 잘 안 느낀다. 스터디 플래너에 적은 계획을 다 지우고 자는 것이 일과다. 그런데 요즘은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전에 그 과정에 대한 회의감이 들어서 지칠 것 같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제게 “공부에 너무 목매달지 말라”고 하신다. 학업에만 너무 매몰되면 사고력이 오히려 떨어진다고 생각하셔서다. 틀에 박힌 한국 교육 과정을 거치다 보면 일상생활에서 자유로운 사고력이 저해되는 느낌을 받는다. 더 넓은 미래를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인데, 막상 공부하다 보면 미래를 바라보기가 힘들어지는 것 같다. 이렇게 사는 게 맞는지에 대해 고민이 된다.

 

영주(70대): 너희들이 조금 더 편하게 살 수 있게 해야 했는데 미안하다. 나도 딸이 고3이었을 때 공부를 그만하라고 했다. 내가 그랬듯이 엄마의 말씀도 진심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저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신 말씀일 수도 있지만, 어른들은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더 멀리 봤으면 하셨을 것이다. 인생이 살 만하다고 느낄 정도로만 공부했으면 좋겠다.

 

 

 

민정(20대): 대학생 때 진로 고민이 많았다. 지금도 여전하다. 하지만 이제는 원한다고 해서 전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노력은 하지만 살다 보면 뜻대로 되지 않는 것도 있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산다. 첫 직장에 들어가도 진로에 대한 고민은 끝이 아니다. 취업 이후에 새로운 경험을 하며 시야가 더 넓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든 하고 싶은 일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진로를 꼭 한정 짓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진로에 대한 두려움은 당연하지만, 그것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윤성(50대): 하고 싶은 일들을 충분히 다 해낼 정도의 시간이 주어질지 가장 걱정되고 두렵다. 어느 순간부터 내 기억력을 못 믿게 됐다.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오늘 할 일이 무엇인지 갑자기 생각이 안 난다. 영화 모임에서 많은 영화를 보는데, 제목과 내용이 떠오르지 않는다. ‘치매에 걸리게 되는 건 아닌가’ 생각도 했다. 시력, 청력, 인지력처럼 ‘력’이 붙는 것들이 점점 약해지는 걸 느낀다. 그렇다 보니 뭘 좋아하는지 늦게 발견해 늦게 시작한 만큼 마음이 급해진다. 또 지금 하는 공부를 활용해서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지도 고민이다.

 

 

영주(70대): 나는 윤성님 같은 50대에 앞으로 어떻게 늙을 것인지를 가장 골똘히 생각했다. 내가 그 나이였을 때쯤 이대에서 다시 공부하러 오라고 연락이 왔다. 이후 64살에 박사학위를 취득하려 했을 때 “지금 그거 해서 뭐 하려고 그래”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데도 그냥 하고 싶어서, 알고 싶어서 했다.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나서는 강의를 하고 싶었지만, 기억력이 약해져서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세계를 보는 눈을 얻었기 때문에 공부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 시점에서는 사회에서 소외되는 것이 두렵다. 태극기 부대 시위하는 곳 앞에서 전철을 기다리던 적이 있다. 거기 있던 50대들이 태극기 부대가 시위하는 것을 보면서 “요즘에 왜들 그렇게 건강하게 오래 사냐”며 “의학이 발달하니까 힘이 남아서 태극기 들고 난리”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그렇게 말하고 내 쪽을 돌아보더니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가만히 서서 전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를 사회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고 그저 나이가 들어간 것뿐이다.

죽음도 두렵다. 10년 전 남편을 잃었기 때문에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을 잘 알고 있다. 죽는 과정은 그 누구도 미리 알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몸을 열심히 보살폈어도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하다가 죽고, 어떤 사람은 건강하게 살다 떠난다. 나의 죽음은 어떨지, 어떤 고통을 받으며 갈지 두렵다. 하지만 이럴수록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인생에 좋은 일도 있지만 고통스러운 일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다. 남의 일을 보듯이 볼 수 있어야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다.

 

20대 정민정씨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있는 좌담회 참석자들의 모습이다. <strong>이자빈 사진기자
20대 정민정씨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있는 좌담회 참석자들의 모습이다. 이자빈 사진기자

이대학보 유튜브에서 [시간을 달리는 여자들] 주인공 7명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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