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향신호기가 부착된 마르부르크의 신호등 <strong> 강동주 기자
음향신호기가 부착된 마르부르크의 신호등 강동주 기자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흰지팡이 끝이 올록볼록한 돌바닥을 드르륵 쓰는 소리. 어딜 가든 신호등에 초록불이 켜질 때면 들려오는 안내 소리. 독일의 한 도시 마르부르크에서는 일상적인 소리다.

시청 앞 광장 한 레스토랑에 시각장애인이 들어와 앉으니 점원이 다가가 메뉴판 속 음식을 말로 설명한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점원은 고객이 음식을 고를 때까지 메뉴를 하나씩 설명했다. 마르부르크 필립스 대학(필립스 대학)의 장애지원센터 직원 중 한 명도 시각장애인이다. 그는 컴퓨터 화면 속 글자를 소리로 읽어주는 화면 리더기와 점자로 변환시켜주는 점자변환기를 이용해 업무를 수행한다.

마르부르크에서는 한국보다 많은 시각장애인들을 볼 수 있다. 단순히 장애인의 수가많아서가 아니다. 시각장애인 유도 블록, 자동문 등 사회적 장벽을 낮추기 위한 노력이 도시 곳곳에 깃들어 있는 덕분이다. 무엇이 이 도시를 장애친화적으로 만들었을까.

 

연대로 시작된 배리어프리

도시의 주요 장소나 건물에는 촉각 지도가 있다. 우측 하단에는 점자로 설명이 쓰여져 있다. <strong> 신예린 기자
도시의 주요 장소나 건물에는 촉각 지도가 있다. 우측 하단에는 점자로 설명이 쓰여져 있다. 신예린 기자

 시작은 장애인들의 연대였다. 1970년대 마르부르크에 살던 장애인들은 함께 모여 정치적 활동을 시작했다. 활동이 활발해지며 그들의 요구 사항이 행정부에 받아들여졌다. 마르부르크 시청의 홍보 담당자 비어기트 하임리히(Birgit Heimrich)씨는 “장애인들의 집단적 움직임이 마르부르크가 다른 마을보다 일찍 장벽 없는 마을이 되도록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후 1980년 마르부르크는 공식적으로 장애인과 관련된 논의를 추진할 대표를 선정했다. 1997년에는 장애인 자문 위원회가 설립되기도 했다. 장애인 커뮤니티가 5년에 한 번 직접 선발하는 자문 위원회는 정치 관련 위원회에서 장애인들의 요구사항이 원활히 논의될 수 있도록 지원한다. 2002년에는 ‘barrierfree Marburg(마르부르크의 배리어프리)’ 결의안이 채택됐다.

결의안 채택 후 마르부르크는 계속해서 도시의 장벽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마르부르크의 행정부에서는 도시 계획과 배리어프리 건축물을 만들기 위한 원탁회의가 주기적으로 열린다. 회의를 바탕으로 건물 입구나 횡단보도 경계석의 턱이 없어지기도 하고 경사로에는 손잡이가 설치되기도 한다. 또 대부분의 신호등에는 음향신호기가 부착돼 있다. 신호음이 들릴 뿐 아니라 신호기의 버튼을 눌러서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시간을 늘릴 수도 있다.

배리어프리 환경이 잘 구축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합의가 일찍 이루어진 데 있었다. 하임리히씨는 “1970년대의 강력한 집단 운동 이후 모든 국민들이 사회활동에 참여하고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데 정당들이 일찌감치 합의했다”고 말했다.

그는 블리스타(blista)의 영향력도 강조했다. 블리스타는 시각장애인 역량 강화를 위해 마르부르크에 설립된 센터다. 그는 “마르부르크는 블리스타가 있어 다른 도시에 비해 장애인 인구 비율이 높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다보니 장애인들이 사회에서 가시화되고 비장애인들과 더불어 사는 장애친화적인 마을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덧붙였다.

 

장애친화도시, 기반에는 블리스타가 있다

마르부르크에 위치한 시각장애인 교육 시설 블리스타 <strong> 강동주 기자
마르부르크에 위치한 시각장애인 교육 시설 블리스타 강동주 기자

1915년, 마르부르크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파편, 폭발, 독가스로 인해 실명한 군인들을 위한 직업 코스가 개설됐다. 당시 안과 의사 알프레드 비엘쇼프스키(Alfred Bielschowsky)는 시각장애 학생을 고용해 실명한 병사들에게 점자를 가르쳤다. 이것이 오늘날 블리스타의 시초다. 블리스타는 시각장애인과 소수자를 위해 운영되는 역량 센터다. 유럽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가장 큰 센터라는 명성에 독일 전역을 넘어 해외에서도 학생들이 찾아온다.

 

블리스타의 프로젝트 매니저 사비나 침머만시와 홍보 담당자 토어스텐 뷔흐너씨 (왼쪽부터). <string> 신예린 기자
블리스타의 프로젝트 매니저 사비나 침머만시와 홍보 담당자 토어스텐 뷔흐너씨 (왼쪽부터). 신예린 기자

블리스타의 일차적인 목적은 교육이다. 어린이집부터 초등학교, 중등학교가 블리스타 캠퍼스 내에 위치하고 있다. 장애학생만 센터에서 교육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장애학생도 이곳에서 함께 교육을 받는다. 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이 더불어 생활하는 환경인 것이다.

시각장애인을 비롯해 노인을 위한 기술 및 직업 교육도 진행한다. 노인의 경우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도 노화에 따라 저시력자가 되곤 하기 때문에 블리스타의 교육 대상에 포함된다. 블리스타의 홍보 담당자 토어스텐 뷔흐너(Thorsten Büchner)씨는 “수학, 화학, 지리 등 학문에 대한 학습도 중요하지만 결국 시각장애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삶을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며 일상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블리스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도서관 내부에 마련된 녹음실. 봉사자들이 매주 책과 매거진을 녹음한다. <strong> 강동주 기자
도서관 내부에 마련된 녹음실. 봉사자들이 매주 책과 매거진을 녹음한다. 강동주 기자

 블리스타의 역할은 단순히 하나로 규정되진 않는다. 블리스타에는 시각장애인의 알 권리와 독서권을 보장하기 위한 도서관이 있다. 1954년 독일 최초의 오디오 도서관으로 시작된 이 곳에는 그림책부터 학술 서적까지 만 권 이상의 점자도서와 4만 권 이상의 오디오북이 마련돼 있다. 도서관 한 켠에 위치한 녹음실에서는 매주 봉사자들이 단행본 도서나 매거진을 녹음한다. 이렇게 녹음된 매거진 파일은 매주 금요일 오후6시에 구독자들에게 전달된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도구나 수업 과정을 개발하기도 한다. 시각장애인들이 보행할 때 사용하는 접이식 흰지팡이도 블리스타가 만든 도구 중 하나다. 학문에 있어서는 특히 자연과학 분야에서의 개발이 활발하다. 예를 들어 물 분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는 없지만 3D 프린팅을 통해 분자를 3차원 형태로 만들어 만져보면서 이해하는 식이다.

블리스타의 프로젝트 매니저인 사비나 침머만(Sabine Zimmermann)씨는 “이 지역에처음 와서 가장 놀랐던 점이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누구나 자유롭게 거리를 거닐고 그 모습이 일상이라는 점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블리스타의 교육과 활동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울려 살아가게 만든다”며 블리스타가 도시 문화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했다. 마르부르크의 장벽을 허문 것은 자연스러운 공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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