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싱키 전체가 중고 시장으로 바뀌는 날, 시보우스빠이바

편집자주│한국에서 ‘빈티지’하면 떠오르는 곳, 동묘. 빈티지는 고전적으로 돌아오는 유행이다. 중고물품 구매는 벼룩시장이나 빈티지 샵처럼 특정 공간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최근 대중화된 중고 거래는 애플리케이션 ‘당근마켓’과 같이 온라인을 통해 이루어진다. 한국과 달리 중고가 일상에 녹아있고, 나아가 집단적 연대의 수단인 곳이 있다. 이대학보는 중고 거래를 통해 환경 보호를 실천하며, 시민 사회의 연대를 실현하고 있는 핀란드 헬싱키(Helsinki)로 떠났다.

헬싱키 거리를 걷다 보면, 세 블록에 한 번꼴로 중고가게나 빈티지 샵이 등장한다. 이들에게 중고는 유행보단 일상에 가깝다. UFF(우프), FIDA(피다), Itsepalvelu(잇세빨베루), Kierratyskeskus(리싸이클링 센터). 도심 곳곳 자리 잡은 중고가게는 물품을 수급하고 판매하는 방식이 제각각이다. 하루 1300명이 방문하는 중고가게 피다. 책, 가구를 비롯한 생활용품을 주로 판매한다. 피다는 소피아(Sofia·여·11)와 루트(Ruut·여·11)의 놀이터다. 소피아와 루트는 쉬는 날이면 중고가게에 들러 서로에게 잘 어울리는 옷을 골라준다. 피다가 무슨 가게인지, 중고가게가 무엇인지 묻자, 이들은 “모른다”고 답했다. 피다는 그저 길을 가다가 들어가고 싶으면 들어가는 평범한 가게일 뿐이다.

어린아이에게만 놀이터인 것은 아니다. 소피아와 루트 옆에서 음악 앨범 코너를 구경하던 타루(Taru·여·51)씨는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가장 먼저 피다를 방문한다. 그는 피다를 보물찾기에 비유했다. “마치 보물을 찾는 것처럼 항상 재밌고 새로워요.”

 

핀란드인은 왜 중고를 애용하나

핀란드 사람들이 중고물품을 애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용이(Gyöngyi Fazekas·여·32)씨는 한 달에 2번, 정기적으로 중고가게에 방문해 옷과 신발, 주방용품을 구매한다. 용이씨가 중고물품을 구매하는 이유는 환경 보호를 위함이다. 아직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라면 그 쓰임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현세대의 의무로 봤다. 그는 “이미 세상에는 많은 물건이 존재한다”며 “물건을 구매하는 것을 넘어, 쓰고 버리는 것까지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용이씨는 “역사가 있는 물건을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리비(leevi·남·24)씨가 중고가게에서 옷을 구매하는 가장 큰 이유도 환경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는 “우프에서 똑같은 제품은 없다”며 “유일무이한 독특함이 매력”이라고 말했다. 리비씨는 “‘H&M’ 가게에 가면 걸려있는 옷이 항상 똑같지만 우프는 매일 다른 제품이 진열된다”고 말했다.

우프는 아침마다 새로운 물품으로 채워지고 대부분 기부로 들어온다.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 있는 우프 체인점은 총 14곳이지만 기부 상자는 셀 수 없이 많다. 기부된 물품은 헬싱키에 있는 분류 센터로 모이고, 빈티지 의류와 일반 의류로 나뉜다. 빈티지 의류는 vintage 우프로, 일반 의류는 normal 우프로 배송된다. normal 우프에는 유행하는 브랜드의 옷들이 저렴하게 판매되고, vintage 우프는 더 세부적인 기준을 충족한 옷을 선별해 더 비싼 가격에 진열한다.

 

비슷한 듯 보이지만 각양각색 매력의 핀란드 중고가게

핀란드에 있는 다양한 중고가게들은 비슷한 듯하지만, 고유의 색깔이 있다. 기부 방식도, 주력 상품도 달라 하루 종일 중고가게를 탐방하는 경우가 많다. 우프에서 만난 리비씨도 피다에서 다시 만나 반갑게 인사 나눴다. 우프 매니저 노라(Nora·여·27)씨는 우프가 자체적인 기준을 가지고 옷을 선별하는 것에 자부심을 보였다. 노라씨는 “피다는 일반 벼룩시장과 비슷하다”며 “우프는 자체적인 분류 기준을 갖추고 있어 vintage 우프의 경우 일반 옷보다 더 트렌디하다”고 말했다.

기부받은 옷을 그들만의 기준으로 선별하는 우프와 달리 피다는 ‘옷이 깨끗하거나 좋은 상태’라는 단일 기준을 갖는다. 무료로 픽업 서비스를 제공하는 피다는 물품을 가지러 간 직원이 직접 제품 상태를 평가한다.

우프와 피다는 차이점이 명확하다. 본사에서 가격을 결정하는 우프와 달리 피다는 각 매장의 자율성을 중시한다. 또한, 매일 진열 상품이 달라지는 우프에 비해 피다는 진열 상품의 회전율이 낮았다. 피다의 직원인 미사(Miisa·여·24)씨는 “한 매장에 계절별로 제품을 분류해 전시한다”며 “필수적인 제품만 받아 물류 운송을 최소화한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다른 중고가게인 리싸이클링 센터는 무료 나눔 코너를 운영한다.

피다의 물류 트럭이 새로 기부받은 중고물품을 배달하기 위해 매장 앞에 서 있다. <strong>김민아 기자
피다의 물류 트럭이 새로 기부받은 중고물품을 배달하기 위해 매장 앞에 서 있다. 김민아 기자

 

개성 넘치는 물건으로 가득 채워진 진열장

핀란드 중고가게 중 가장 독특한 형태인 ‘잇세빨베루’는 제품이 아닌 공간을 빌려준다. 핀란드에만 있는 중고가게 형태로 영어로 self-service(셀프서비스)를 의미한다. 가게 여러 선반에는 번호표가 붙어있어, 중고제품을 판매하려는 사람들은 돈을 주고 선반을 대여한다. 판매 물건들을 진열한 뒤에는 판매자가 가게에 상주하지 않는다. 물건을 결제하고 관리하는 직원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사장인 니코(Niko·남)씨에 따르면, 가게는 총 54개의 임대 공간을 보유했으며, 대여비는 2주에 90유로(한화 약 12만 원)였다.

잇세빨베루에 방문한 손님은 취향에 맞는 진열장을 찾아다닌다. 소피아(Sofia·여·26)씨는 “진열장이 주인의 스타일을 반영하고 있어, 원하는 물건을 찾기가 편리하다”고 말했다. 고전적이고 고풍스러운 분위기, 과감한 색감의 의류, 깔끔한 무채색의 액세서리 등 진열장마다 개성이 매우 뚜렷했다.

잇세빨베루에서 옷을 고르는 사람들. 진열대마다 판매물품의 독특한 스타일이 돋보인다. <strong>나민서 기자
잇세빨베루에서 옷을 고르는 사람들. 진열대마다 판매물품의 독특한 스타일이 돋보인다. 나민서 기자

 단종된 제품을 구하는 재미도 있다. 파울라(paula·여·77)씨는 피다에 책을 기부하고, 바로 잇세빨베루에 방문했다. 판매가 중단된 잡지를 구매하기 위함이다. 파울라씨는 37년간 중고물품만을 구매해 사용해오고 있다. 그는 오랜 세월에서 묻어나오는 옷의 색감을 특히나 좋아한다. 그가 입고 있던 자줏빛 원피스 역시 중고가게에서 구매해 재봉틀로 수선한 옷이었다.

 

일 년에 두 번, 중고 물건들로 헬싱키가 뒤덮이는 날

핀란드인에게 일상인 중고문화가 특별한 행사가 되는 날도 있다. 일 년에 두 번, 헬싱키 전체가 중고 장터로 바뀌는 ‘시보우스빠이바(siivouspaiva)’다. ‘청소의 날’이라는 뜻의 시보우스빠이바는 2012년 5월12일부터 매년 진행됐다. 행사 당일, 수천 명의 사람이 길거리와 공원, 집 앞에 돗자리를 펼쳐 자신의 물건을 판매한다. 종교와 관련된 역사적 의의가 있는 곳을 제외하고는 어디든 장터가 된다.

중고 거래를 위해 일부 특정 공간을 사람들이 직접 찾아가는 한국과 달리, 시보우스빠이바는 도시 전체를 중고 시장으로 활용한다. 행사 날, 구매자는 헬싱키 전역 지도를 보며 원하는 물건을 파는 판매자를 찾아간다. 시보우스빠이바는 ‘지도를 보고 찾아간 위치에서 판매자를 만나는 약속이 생기는 날이다.

판매 공지를 보고, 구매자가 판매 위치를 찾아가는 것이 시보우스빠이바의 가장 중요한 규칙이다. 시민들은 한 달 전부터 시보우스빠이바 홈페이지(siivouspaiva.com)가 제공하는 지도에 자신의 물건을 판매할 위치와 간단한 정보를 공지한다. 판매 물품, 영업시간 등 세부 안내가 바뀔 때마다 업데이트해야 한다. 2023년 5월27일에 진행된 행사에서는 약 1300개의 공지가 올라왔다.

시보우스빠이바는 자가용이 없고 도심에 거주하지 않으면 재활용을 실천하기 어렵다는 빠울리나(Pauliina·여)씨의 불편함에서 시작됐다. 페이스북에서 친구들과 재활용하기 어려운 핀란드 환경에 관해 이야기하던 빠울리나씨는 벼룩시장과 재활용의 날을 고안했다. 일상에서 느낀 불편함은 누구나 거리로 나와 물건을 사고팔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발전된 것이다.

빠울리나씨는 “핀란드에 이미 있던 ‘레스토랑 데이(Restaurant Day)’의 운영 방식을 시보우스빠이바에 적용했다”고 말했다. 레스토랑 데이는 원하는 사람들이 어디서든 음식을 요리해 판매할 수 있는 날이다. 누구든 하루 동안 식당, 카페, 바의 주인이 된다. 사람들은 레스토랑 데이가 되면 위치 기반 온라인 서비스를 활용해 자신이 연 식당의 위치를 공유한다. 빠울리나씨는 이러한 서비스를 시보우스빠이바에 적용했다.

2012년, 한 여성이 고안한 사소한 아이디어는 이제 수천 명의 헬싱키 시민들이 거리로 나오는 큰 행사가 됐다. 빠울리나씨는 “원래 행사 목적이 중고제품을 쉽게 사고팔기 위함이었지만 이제는 하나의 축제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시보우스빠이바가 기념일로 자리 잡은 주요 요인으로 ‘재미’를 꼽았다. 나만의 벼룩시장을 설치하고 사람들이 모여 도시가 활기를 띠는 것을 좋아하는 핀란드인의 취향을 저격한 것이다. 도심의 활기와 사람들 간의 교류를 느낀 사람들은 시보우스빠이바가 지속되게 만든다. 다음에 진행될 시보우스빠이바는 2024년 5월25일(토)로 예정돼 있다.

 

중고 물품과 함께 오가는 연대

시보우스빠이바가 만든 약속은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더 교류할 계기를 만든다. 시보우스빠이바를 주관하는 카티(kati·여·53)씨는 “평범한 날에 사람들은 가게가 아닌 곳에서 중고물품을 살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 옷을 집 밖에 꺼내둔다고 활발히 판매되지는 않는다”며 “시보우스빠이바를 하는 날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가 생각한 시보우스빠이바의 힘이다.

시보우스빠이바를 주관하고 있는 카티씨. 변호사를 겸업하고 있다. <strong>나민서 기자
시보우스빠이바를 주관하고 있는 카티씨. 변호사를 겸업하고 있다. 나민서 기자

행사를 기획하는 팀원들은 해당 업무 외에도 본업을 가지고 있다. 변호사인 카티씨는 “시민들이 4월부터 규칙이나 장소를 물어보기 시작한다”며 “행사가 다가올수록 주차 위치나 협업 제안과 같은 질문이 많아진다”고 말했다. 이들은 기업이나 상업단체의 참여를 반기지 않는다. 시보우스빠이바는 기업이나 상업단체가 돈을 버는 목적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연대를 도모하기 위한 목적이다. 기업이나 상업단체가 참여하려면 일정 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 외 참가자는 행사에 무료로 참여한다. 카티씨는 “지도에 판매 위치를 등록할 때 (상점이나 기업도 상호가 아닌) 개인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카티씨는 시보우스빠이바의 중요성을 “함께 무언가를 해내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에서 찾았다. 행사에 참여한 이들은 SNS로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위치를 공유하며 함께하고 있다는 연대를 느낀다. “여러 사람이 같은 활동을 한다는 것을 확인하면 실제로 함께하고 있다고 느끼게 돼요. 친환경, 지속가능성도 중요하지만,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이 큰 힘을 가져요.” 중고 거래는 환경을 위한 실천 방법이자 공동체 의식을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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