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본지는 1616호부터 1620호까지 학보메이트로부터 직접 여성학과 관련된 질문을 받고 그에 대한 답변을 본교 전문가 선생님들로부터 들어보는 칼럼 코너 ‘똑똑, 여성학에 묻습니다’를 운영해 독자들로부터 긍정적인 호응을 이끌어낸 바 있습니다. 이에 1638호부터 1642호까지 코너를 확대 및 재연재합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여성학과 관련된 학우들의 궁금증을 넘어 일상적인 고민 기반의 사연까지 폭넓게 답변을 들어봅니다.

 

다섯 번째 질문

예전에는 여성 관련 이슈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즐겼지만 최근에는 관련 논의에 피로감을 느껴 비슷한 내용의 제목만 봐도 피하게 된다. 스스로 정신의 성숙이 퇴화했다는 자책감이 드는데, 어떻게 극복할 수 있나?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이른바 ‘페미니즘 대중화의 시대’가 되었다고 말한다. 1990년대 이후 대학에서 여성학 강좌가 늘어나면서 페미니즘 세례를 받은 세대도 생겨났고, 강남역 사건, 미투 이후 페미니즘에 대한 청년 세대들의 관심도 높아졌다. 최근 정치 영역에서도 페미니즘이 중요한 정치적 의제가 되었으며, 페미니즘 관련 신간 서적도 빠르게 출간되고 있다. 대법원 판결문에 성인지 감수성 개념이 명시되고, 성인지 정책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와 기대 수준도 높아지고 있다. 뉴스에서 페미니즘이나 성인지 감수성 용어를 어렵지 않게 접하게 될 때, 페미니즘의 대중화를 느끼게 된다. 페미니즘을 간단히 정의하는 것은 어렵지만, 성차별과 페미니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매우 반갑고 기쁜 일이다.

그러나 성차별을 해소하고 평등한 사회를 위한 변화가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굳이 역사를 돌아보지 않더라도 사회적 변화에는 늘 다양한 입장과 저항이 있어왔다.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만큼이나 페미니즘에 대한 피로감이나 백래시도 늘어나고 있다. 일부 대학에서 총여학생회가 폐지되고, 대학원 여성학 과정이 줄어들거나 여성학 관련 강의가 축소되기도 한다. 또한 여성학 관련 수업을 수강하거나 관련 동아리 활동을 하거나 혹은 성평등을 이야기하면, ‘페미니스트 낙인’을 감수해야 한다. 최근에는 남녀공학 대학에서 여성학 강의에 대한 강의 평가 테러 이야기도 들려온다. 페미니즘에 대한 피로감은 여성학 혹은 페미니즘을 시대착오적인 주장으로 만들고, 개인의 노력과 능력을 더 강조한다.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될수록 기회의 평등과 경쟁이 강조되고,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한 공정과 능력주의 신화가 힘을 얻는다. 그러나 마이클 샌델의 지적처럼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은폐하고, 공정은 차별을 비가시화한다.

올해 초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는 대선 후보의 발언은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와 피로감이라는 맥락에서 단순히 한 개인의 인식이라거나 혹은 선거용 발언으로만 보기 어렵다. ‘구조적 성차별이 없다’는 인식은 누구나 개인의 노력으로 차별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만들고, 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국가의 책임과 역할을 최소화하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가족부 폐지 논란은 지난 이명박 정부 때에도 있었으나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와 피로감이 높아진 지금의 상황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 여성부는 있는데 남성부는 없느냐’라는 질문처럼, 평등은 동등한 기회와 형평으로 축소되고 결과의 불평등은 개인의 노력과 능력 부족의 결과로 받아들여진다.

공정과 능력주의 신화 속에서 더 이상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드러내거나 혹은 성평등을 이야기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거나 혹은 능력이 부족한데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페미니즘은 젠더 불평등 해소를 위한 이론이자 사상, 행동, 실천과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는 페미니즘을 배우고 토론하고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공론의 장을 축소시킨다. 또한 온라인 공간을 중심으로 페미니즘 혹은 여성가족부가 마치 ‘젠더 갈등’의 원인인 것처럼 만들어진다. 그래서 지금 한국의 페미니즘은 ‘진정한 페미니스트’ 혹은 ‘진짜 페미니즘’이 아니며, ‘완벽한 페미니즘’이라는 환상을 통해 쉽게 페미니즘을 비판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백래시의 문제는 ‘차별’을 ‘갈등’으로 전환하고, 성평등이나 젠더에 대한 이야기를 두렵게 하며 스스로 ‘자기 검열’에 빠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변화에는 늘 광범위한 저항이 있을 수 있으며, 더욱이 아주 오랫동안 형성되어 온 성차별적 구조와 인식을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울 리 없다. 그래서 백래시와 저항을 ‘실패의 표시’ 혹은 ‘제거해야 문제’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변화의 과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즉 변화에 대한 저항은 변화를 위한 핵심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저항의 방식은 명백하거나 또는 암묵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며, 저항의 내용도 젠더 관계 변화에 대한 요구를 부정하거나 혹은 성평등 문제를 사소하게 여기는 것, 또는 문제 해결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페미니즘에 대한 피로감 역시 변화에 대한 저항으로 볼 수 있으며, 우리 사회의 남성 특권과 권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퍼거슨은 저항을 그 자체로 부정적이거나 사라져야 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성평등을 향해 개인과 제도가 변화해 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생산적 긴장’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에 대한 피로감을 호소하고 ‘여성가족부 폐지’가 공약이 되는 시대에 어떻게 변화에 대한 저항을 ‘생산적 저항’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페미니즘에 대한 피로감과 백래시는 우리를 침묵하게 하며, 침묵은 저항의 효과를 최대화한다. ‘생산적 저항’으로 만들기 위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다. 안전한 공간이란 물리적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하게 말하고 들을 수 있는 관계에 대한 것이다. 먼저 오랜 역사 속에서 존재해왔던 페미니스트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말하기를 통해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인식하고, 존중하는 법을 배우며 권력관계에서 ‘모두’라는 이름으로 비가시화되는 존재들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상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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