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똑똑, 여성학에 묻습니다’는 본교 여성학 전문가들이 학생의 질문에 답하는 칼럼 코너입니다. 이대학보 온라인 패널단 학보메이트에게 페미니즘과 관련해 묻고 싶은 질문을 받아, 그중 5개의 질문을 꼽았습니다. 1620호까지 연재됩니다.

 

두 번째 질문

트랜스젠더는 기존의 젠더 이분적인 프레임을 고착화시킨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방향과 어긋난다는 주장이 있다. 페미니즘에선 트랜스젠더를 어떻게 바라보나?

“트랜스젠더는 페미니즘의 적이며 ‘진짜 여성’의 권리를 뺏는다”는 말이 흔하게 들리는 요즘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많은 페미니스트가 지금으로부터 몇십 년 전부터 페미니즘 안에서의 트랜스젠더 위치를 치열하게 고민해왔다는 점이다. ‘트랜스젠더와 여성의 권리는 공존할 수 없는가?’, ‘그렇다면 여기서 ‘여성’으로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같은 질문들을 던지면서 말이다.

질문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서는 우선 젠더를 둘러싼 논의가 거쳐 온 과정을 되짚을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 논의에서 ‘젠더’는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1970년대 영어권 페미니즘은 여성 억압의 사회문화적 성질을 밝혀 당시 지배적인 신념이었던 생물학적 본질주의에 반박하기 위해 젠더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성차별의 원인이, 여성과 남성이 가진 몸의 차이가 아니라 문화에 있기 때문에 상황이 얼마든지 바뀔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하게 취급하는 사회 현상을 비판하고 함께 불평등에 맞서는 데 젠더 개념은 유용하게 쓰였다.

하지만 앞선 논의는 섹스와 젠더를 대립적인 개념으로만 보면서 ‘자연 대 문화’라는 오랜 이분법을 강화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즉, 젠더가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인간이 본디 둘로 나뉠 수 있는 생물학적 특성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점은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젠더의 변화 가능성을 이야기해도 결론은 “여자는 남자랑 천성이 달라서 그래!”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섹스를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근본이자 인간이 개입 불가능한 성역으로 다루면서, ‘여성됨의 본질은 없다’는 애초의 전제를 페미니즘 스스로 어긴 것이다. 모니크 위티그, 제인 플렉스, 주디스 버틀러, 크리스틴 델피와 같은 페미니스트들은 바로 이 점을 비판하고 젠더와 섹스를 인식하는 틀 자체를 심문하는 작업으로 나아갔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이쯤이면 “생물학적 섹스가 엄연히 존재하는 걸 어쩌란 말이냐?” 하는 답답함이 생길지 모른다. 그런데 “여기까지 여성, 저기부터는 남성” 같은 식으로 섹스가 늘 명료하고 일관적으로 구분된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섹스를 가르는 기준은 시대와 장소마다 다르고, 의사가 섹스를 정상 혹은 병으로 진단하는 데에도 어김없이 당대의 편견이 반영된다. 심지어는 섹스에 대한 집단의식이 거꾸로 몸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성역할 구분이 심한 문화일수록 여성의 몸은 더 ‘여자답게’ 남성의 몸은 더 ‘남자답게’ 변화하는 것이다. 이미 여러 페미니스트는 이처럼 섹스가 문화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생물학적 요소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해왔다. 페미니스트로서 널리 통용되는 객관성을 의심하고, 입장에 따라 현실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성찰하면서, 그 권력의 배치를 민감하게 살핀 결과였다. 다시 돌아가자면, 지구에는 인구수만큼이나 가지각색의 섹스가 있다. 이는 ‘갑자기 등장한’ 소위 젠더론 탓이 아니다. 우리가 ‘인간은 무조건 여자 아니면 남자’라는 이분법적인 규범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기에 다양성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다. 이 규범은 다양한 섹스와 젠더를 즐기지 못하게 만들고 ‘모호한’ 몸들을 재단했으며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부정했다.

절대 변하지 않는 필연적인 여성과 남성 사이의 차이, 즉 성차가 있다는 논리는 사실상 가부장제가 여성을(그리고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를) 억압하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가부장제가 주어진 섹스에 따른 역할을 강요하고 이에 불응하면 폭력을 행사하는 체제라면, 페미니즘은 이 체제에 저항하는 사상이다. 그렇기에 페미니즘이 트랜스젠더 인권 문제와 밀착된 이유는 “페미니스트라면 마땅히 모든 사람을 고려해야 한다”는 도덕적 기준 때문도 아니고, 단순히 인권을 “쓰까(섞어)” 먹기 위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트랜스젠더 혐오는 그 자체로 페미니즘의 목표에 모순되고 억압에 공모하는 탓에 문제가 있다. 트랜스젠더들이 줄곧 마주하는 “태어날 때 지정받은 섹스에 알맞게 살고 평범하게 행동하라”는 요구는 시스젠더 여성들도 익히 들어온 가부장제의 명령과 똑 닮지 않았는가?

세상은 다양성으로 가득 차 있지만, 상대적으로 기득권(중산층, 비장애인, 이성애자, 시스젠더…) 여성의 경험만이 ‘보편’이 되는 상황을 심심치 않게 목격한다. 이외의 여성들은 ‘예외’로 치부되거나 심지어는 여성으로 불리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한 여성 개인의 경험이 ‘모든’ 여성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 사실로부터 ‘나’의 위치를 파악하고 타인의 삶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투쟁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여성들은 각자의 특수한 맥락에서 억압을 경험하며 현실을 바꾸고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는 일에 ‘따로 또 같이’ 참여한다. 그럼에도 여성(그리고 남성)을 담론 밖의 동질적인 존재로만 가정한다면 당장엔 손쉬운 연대가 가능할지 몰라도 결국 이전과 다름없는 구조 속에서 오히려 규범에서 벗어나 있는 소수자들의 고통만 강화될 것이다.

물론 일부 시스젠더 여성이 그렇듯 일부 트랜스젠더 여성(MTF) 또한 전형적인 ‘여성성’을 좇고 여성의 성역할을 적극 수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뒷이야기는 어떨까? 한국 사회에는 이분법적 젠더 규범을 따르지 않는 경우 트랜지션 시술을 거부하는 의료적 기준과 사람으로조차 취급하지 않는 사법 체계가 도사리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이들이 충분히 ‘여성스럽지’ 않을 때 견뎌야 하는 차별과 낙인, 폭력의 정도는 더욱 크다. 출생 시부터 학교에 가고, 병원을 방문하고, 직장을 얻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당연히 누려야 할 사회적 자원을 박탈당할 위험이 산재할 때 트랜스젠더들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트랜스젠더의 삶을 평면적으로 판단하기보다 사회 구조 전반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이 필요한 이유다. 이러한 분석이 동반될 때 비로소 트랜스젠더의 맥락에서 일어나는 여러 저항적 실천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성애주의·성별이분법·가부장 체제는 서로 얽혀 교차적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 정치는 여러 통찰을 공유하고 있으며 서로에 기대어 각자의 길을 개척해왔다. 여성 범주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 정치의 동반자적 관계는 현재진행형이다. 당연하게도 페미니즘의 계보는 이 지면에 담긴 내용을 훨씬 넘어서 있다. 그 누구라도 이 역사를 누락하고 과거를 모른 체한다고 해서 트랜스젠더로부터 ‘빼앗겼던 권리를 돌려받는’ 승자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대신에 페미니즘의 역사 속에서 트랜스젠더 관련 논의의 복잡한 지형을 파악하는 작업은 2021년 현재를 살아가는 페미니스트로서 자신의 의견을 다듬기 위한 훌륭한 첫걸음이 되리라 믿는다.

박부영 이화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학센터 연구원

∥ 동성애혐오 담론 연구로 여성학 석사를 졸업한 후 여전히 퀴어/페미니즘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다.

주제에 대해 더 깊게 알고싶은 독자들을 위한 필자의 추천도서

-  페미니즘을 퀴어링! (미미 마리누치)

- 젠더 무법자 (케이트 본스타인)

- 트랜스젠더의 역사 (수잔 스트라이커)

- 퀴어 이론 산책하기 (전혜은)

 

관련기사

저작권자 © 이대학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