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똑똑, 여성학에 묻습니다’는 본교 여성학 전문가들이 학생의 질문에 답하는 칼럼 코너입니다. 이대학보 온라인 패널단 학보메이트에게 페미니즘과 관련해 묻고 싶은 질문을 받아, 그중 5개의 질문을 꼽았습니다. 1620호까지 연재됩니다.

 

세 번째 질문

여성만이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생물학적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나? 또 여성을 비하하는 단어들에 미러링으로 등장한 ‘한남’ 등의 단어 사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페미니즘은 여성들만의 운동이고 인식론이고 여성만이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으며, 생물학적 여성만의 경험에 공감하지 못하는 생물학적 남성은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는 시각이 있다. 정말로 그러한가? 생물학적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냐는 물음은 다시금 생물학적 여성이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과 연결된다.

“페미니즘은 여성을 해방하는 학문이다” 언뜻 보이는 당연한 명제 때문에 페미니즘을 자연스럽게 여성의 사상이고 남성의 사상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여성’ 해방의 서사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보편성으로부터 비롯된다. 남성성과 남자라는 사실은 권력과 서로 자연스러운 관계처럼 여겨지고, 여성성과 여자라는 사실과 억압은 그 반대편에 구성된다. 남자라는 사실과 여자라는 사실이 서로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판타지와 성역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억압받는 여성’과 ‘해방’을 이야기할 경우 오히려 그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올 수 있다. 오히려 남성이, 그리고 여성이 어떻게 이야기되고 있는지 질문해야 할 것이다. 페미니즘이 여성이라는 범주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문제 삼으면서 여성을 다루기 때문에 페미니즘의 작업이 오독되기 쉬운 환경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는 생물학적 여성으로서 공통의 경험을 지녔다는 불변의 사실이 있고, 이것이 페미니스트의 조건”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여성과 남성의 차이 역시 근본적으로 어쩔 수 없다는 인식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에 조건이 붙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페미니스트는 누가 자격을 부여해서 되는 위치도 아니다. 누구나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불평등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다만 ‘페미니스트 되기’에는 훈련이 필요할 것이다. 바로 현실의 문제가 어떠한 맥락에서 발생하고 있는지, 권력 관계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남성이 어떻게 이야기되는지, 여성이 어떻게 이야기되는지를 보는 작업, 여성과 남성을 있는 그대로 주어진 것으로 보지 않는 작업이 그러하다.

물론 현실에서 이러한 작업이 녹록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여성혐오 현상으로 인해 남성 집단에 대한 분노는 강해지게 된다. 2015년 메르스갤러리에서 미러링 전략이 등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메갈리아는 여성혐오에 미러링으로 맞선 공간인 ‘메르스갤러리’를 이어받고, 미러링 고전 소설인 ‘이갈리아’의 이름을 차용했다. 초기 ‘메갤’의 미러링 전략은 온라인상의 여성혐오의 심각성을 드러내고 혐오가 가지고 있는 차별성을 여과 없이 보여줬다는 점에서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도덕적 여성’이라는 규범에서 벗어났다는 점, 남초 사이트에서 학습한 트롤링을 여성운동의 전략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전복적인 신선함이 있었다.

하지만 여성혐오에 거울처럼 대항하는 전략이 남성혐오로 명명되면서 성별 불평등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가 발생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동등한 이분법 속에서 남성혐오와 여성혐오가 구축된 것이다. 여성혐오가 있는 만큼 남성혐오도 있다는 말이 만들어지고, 결국 일베나 워마드나 식의 등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저 혐오에 맞선 혐오인지 혐오에 대응하는 전략인지 논쟁하는 과정에서 여혐의 대립 쌍으로 남혐이 만들어졌다. 메갈리아식, 혹은 워마드식 발화는 혐오에 대응하는 전략이면서 혐오에 맞선 혐오이기도 하고 또 그냥 혐오이기도 하다. 발화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온라인 공간의 특성으로 인해 혐오의 언어는 빠르게 확산하고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언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보았을 때 미러링의 전략을 통해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발화하는 행위는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현실을 드러냈다는 점, 즉 여성혐오 현상과 성 불평등한 사회를 가시화 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지만 동시에 한계를 내포한다. 왜냐하면, 기존에 이분법적으로 구획된 성별 체계를 그대로 답습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남’이라는 용어를 절대 만들어내서는 안 됐던 단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혐오와 남성혐오의 등치 구조가 만들어진 원인이 미러링 전략을 활용한 여성들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한남’은 ‘김치녀’에 대항하면서도 한국 남성성의 다층적인 면을 압축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미 성평등이 달성되었다고 착각하는 사회다 보니, ‘한남’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마치 성별 간의 권력 불균형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여성과 남성이 대립하는 것처럼 몰아가는 사회 속에서 ‘남성혐오’라는 언어가 만들어졌다.

미러링의 전략이 페미니스트의 유일한 실천으로 작동하는 현실에는 비판적으로 개입하고 싶다. 미러링은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일 수 있으나 그 효과가 양날의 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여성이 억압받는다고 할 때 사실 모든 여성이 완연하게 동일한 경험을 하지 않음을, 그리고 여성과 남성이 고정되고 주어진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일은 충분히 진행되지 않았다. 페미니즘 운동에서 필요한 전략은 이를 드러냄으로써 그 균열을 엿보는 것이다.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 으레 그런 것, 진짜 여성과 진짜 남성을 문제 삼아 보자. 그래야 페미니즘이 가진 힘, 그리고 페미니즘을 배우는 즐거움을 알 수 있게 된다.

고병진 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 박사과정

| 이화여대에서 여성학과 석사학위를 받고 동대학원 박사과정에 있다. ‘여성’ 범주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연구 중이다.

주제에 대해 더 깊게 알고싶은 독자들을 위한 필자의 추천도서
- 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 혐오발언 (주디스 버틀러) 

- 메갈리아의 반란 (유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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