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똑똑, 여성학에 묻습니다’는 본교 여성학 전문가들이 학생의 질문에 답하는 칼럼 코너입니다. 이대학보 온라인 패널단 학보메이트에게 페미니즘과 관련해 묻고 싶은 질문을 받아, 그 중 5개의 질문을 꼽았습니다. 1616호부터 1620호까지 연재됩니다.

 

첫 번째 질문

SNS에서 페미니즘을 배우는 건 잘못된 것이라는 말을 본 적이 있다. 페미니즘은 학문이기 때문에 학문적인 고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반면, 페미니즘은 실천이자 생활이기 때문에 트위터 등에서도 배울 수 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SNS로 배우는 페미니즘은 잘못된 것인가?

“페미니스트로 산다고 해서 무조건 이상을 따른다거나 이상적 행동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부당하고 불평등한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지 윤리적 차원에서 질문을 던진다. 가령 타인들과 평등한 관계를 형성하는 방법, 사회제도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거나 덜 받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방법, 움직이지 않는 벽처럼 화석화되는 역사에 맞서는 방법을 질문한다.”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영국에서 활동하는 유색인 페미니스트 사라 아메드가 쓴 책이다. 책 제목처럼 이 책은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 페미니스트로서 일한다는 것, 그리고 페미니스트 이후의 삶을 감당한다는 것, 즉 페미니스트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SNS에서 페미니즘을 배우는 것은 잘못된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이 책이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질문은 결국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2015년 ‘메갈리안’의 등장 이후,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 담론은 온라인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는 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SNS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밝히며, 온-오프라인을 오가는 실천을 해왔다. SNS가 가지는 확산성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페미니즘적 실천에 참여할 수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SNS상의 자칭 ‘페미니스트’들의 트랜스젠더에 대한 폭력적인 언설과 특정 성 판매 여성에 대한 비난은, SNS를 통한 페미니즘의 위험성도 함께 고려해야 함을 보여준다. 개인에 대한 비난과 폭력적 언설은 페미니즘과는 거리가 멂에도 불구하고, SNS에서는 특정인을 겨냥하여, 비난하고 단죄하는 모습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개인에 대한 비난이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을 대체하고, 성 판매 여성과 트랜스젠더에 대한 억압적 편견과 폭력이 재생산되기도 하였다. 권력관계와 사회구조에 대한 사유가 결여된 실천은 기존의 불평등하고 억압적인 관계의 반복으로 이어진다.

 

SNS 피드로는 다층적인 억압과 불평등도 단순화된다. 한국 사회의 차별과 억압을 단순화시키지 않고, 스스로의 위치를 돌아보기 위해서는 이론적, 학문적 접근이 도움이 될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SNS 피드로는 다층적인 억압과 불평등도 단순화된다. 한국 사회의 차별과 억압을 단순화시키지 않고, 스스로의 위치를 돌아보기 위해서는 이론적, 학문적 접근이 도움이 될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흔히 페미니즘은 일상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는 말들을 한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일상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 사유의 결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페미니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사유할 것을 요청한다.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인 오드리 로드는 고통(pain)과 괴로움(suffering)을 구분하면서, 고통은 “어떤 식으로든 인식되고, 명명되고 활용”되는 것으로서, 괴로움은 이러한 “성찰과 소화 과정을 거치지 못한 고통”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구분은 자의식적 과정으로서의 성찰과 사유를 의미하고, 이는 결국 특정한 관점과 앎의 필요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사라 아메드 역시 고통과 좌절, 분노와 같은 감정이 피해자 자신이나 가해자 개인을 향하는 것을 넘어, 폭력을 재생산하는 세계를 향하도록 방향을 획득하는 것을 지식이라고 말한다. 즉, 페미니즘을 배운다는 것은 어떻게 위계적이고 차별적인 사회가 유지, 재생산되는지에 대해 스스로의 지식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페미니스트에게 필요한 사유는 한국사회의 성차별주의, 현재 한국사회의 젠더 관계 등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사회에 놓여있는 스스로의 위치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은 여러 위계질서의 교차를 사유하고, 하나의 축으로만 환원될 수 없는 권력관계에 대한 고려를 요청한다. 억압의 교차성을 고려하지 않는 페미니즘은 결국 계급, 인종, 성적 지향 등에서 특정한 여성의 경험과 이해만을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70-80년대의 페미니즘의 백인 중심성을 비판했던,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인 오드리 로드의 비판은 이러한 맥락에 놓여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의 ‘나’의 위치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성차별적인 사회에서의 여성이기도 하지만, 이성애 중심적 사회에서의 이성애자이기도 하며, 한국 사회에서는 난민이 아닌 시민권자이기도 하다. 즉, 한 사회에서 개인의 위치는 다층적이며, 언제나 소위 ‘약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를 고민하지 못하고, 단순히 나의 위치를 ‘여성’이라는 범주로 동질화시키고 피해자의 위치로만 둔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와 다른 위치에 있는 ‘여성’들, 다른 존재들을 배제하는 것이다. 오드리 로드의 말을 인용하자면 “자신이 겪는 억압에만 골몰한 나머지 다른 여성의 얼굴에 자기 힐 자국이 찍힌 것조차 보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실천하고자 하는 페미니즘이 “부당하고 불평등한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지”를 함께 질문하고 사유해가는 과정이라면, 사회구조에 대한 분석과 함께 스스로의 위치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140자로 제한된 SNS 피드로는 다층적인 억압과 불평등도 단순화될 뿐이다. 한국 사회의 차별과 억압을 단순화시키지 않고, 스스로의 위치를 돌아보기 위해서는 다소 딱딱해 보이는 이론적, 학문적 접근이 도움이 될 수 있다. 페미니스트로서의 시야를 넓히기 위한 여정에 페미니스트 고전, 혹은 동시대 페미니스트들의 저작은 좋은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

남승현 이화여대 여성학과 박사과정

∥ 이화여대 여성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성폭력을 가능케 하는 관계의 변화를 고민하며, 현재 한국사회에서 성폭력이 어떤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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