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본지는 1616호부터 1620호까지 학보메이트로부터 직접 여성학과 관련된 질문을 받고 그에 대한 답변을 본교 전문가 선생님들로부터 들어보는 칼럼 코너 ‘똑똑, 여성학에 묻습니다’를 운영해 독자들로부터 긍정적인 호응을 이끌어낸 바 있습니다. 이에 1638호부터 1642호까지 코너를 확대 및 재연재합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여성학과 관련된 학우들의 궁금증을 넘어 일상적인 고민 기반의 사연까지 폭넓게 답변을 들어봅니다.

 

첫 번째 질문
연이은 ‘젠더 갈등’ 이슈로 백래시가 심화된 사회 분위기를 실감하곤 한다. 현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백래시가 이뤄지는지, 페미니스트로서 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궁금하다.

아무래도 백래시의 시대인가보다. 지난 대선에서는 ‘여성가족부 폐지’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페미니즘으로 인해 상처받은 ‘20대 남성’들의 마음을 달래기에 최선을 다한 정치인이 승리하였고, 오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 중인 인권활동가들은 정치의 외면을 받고 있으며 ‘지하철 타기’라는 일상적 삶을 누리고자 하는 장애인들의 움직임은 ‘야만’이라는 모욕을 마주해야 했다. 덧붙이자면 페미니즘 또한 이미 공정한 ‘(무한)경쟁’이라는 엄중한 시대적 요구에 거스르는 ‘불공정’ 행위로 비난받고 있는지 오래다. 백래시의 시대에 시민권을 향한 기본적인 요구들은 ‘특별’하거나 나아가 ‘특권’적인 요구들이 된다.

백래시의 시대를 살아가는 소수자들은 보통의 삶을 누리기 위한 노력과 요구를 반복할수록 보통의 삶을 위협하는 이들로 규정되고 낙인찍힌다. 정체성을 이유로 불이익을 받거나 위험에 처하지 않고 학교나 직장을 다닐 수 있는 가능성, 다른 몸으로 살아간다는 이유로 격리되거나 고립되지 않고 공동체 속에서 함께 할 가능성, 그리고 성평등을 지지하고 페미니즘을 실천하기로 한 선택이 ‘보통’의 삶을 불가능하거나 힘들게 만들지 않을 가능성, 이러한 가능성에 대한 상상과 요구는 한국 사회에서도 이미 수십년째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상상과 요구는 한편으로는 이미 그 도래의 시간이 한참 지나간, 어쩌면 ‘후진적’인 요구들이며 또한 동시에 어쩌면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것처럼 막막하고도 기대되는 급진적인 미래의 것들이다. 오늘도 부단히 움직이는 몸들과 그들의 저항적 운동성은 오늘과 내일 사이에서 새로운 길들을 만들어간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출현하고 있는 ‘반-젠더'(anti-gender) 실천과 백래시의 장면들은 페미니즘의 역사가 만들어내는 마찰과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strong>출처=게티이미지뱅크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출현하고 있는 ‘반-젠더'(anti-gender) 실천과 백래시의 장면들은 페미니즘의 역사가 만들어내는 마찰과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출처=게티이미지뱅크

페미니즘이 다양한 역사와 결들을 갖는 만큼이나 반페미니즘과 백래시 또한 다양한 문법, 정서, 실천들을 만들어낸다. 페미니즘 대중화 혹은 대중적 페미니즘의 시대로 지칭되기 손색없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출현하고 있는 ‘반-젠더(anti-gender)’ 실천과 백래시의 장면들은 페미니즘의 역사가 만들어내는 마찰과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백래시의 시대에 페미니즘과 젠더 정치학은 위험할 뿐 아니라 ‘나쁜’ 생각과 실천이 되었다. 남녀간의 자연스러운 질서를 부인하는 ‘젠더 이데올로기’ 때문에 출생률이 떨어지고 젠더갈등이 심각해지고 청소년들이 성적 문란함에 빠져들고 있으며, ‘보통’ 여성들의 삶과 거리가 먼 엘리트 여성들의 ‘급진’ 페미니즘이 여성 정책을 장악하고 지나친 성평등 정책을 펼치면서 역차별과 불공정을 양산했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각각 보수종교계 채널과 차기 정권의 반페미니즘 정책 기조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다.

‘보통의’ 여성의 이름으로 페미니즘과 여성 정책을 공격하는 보수주의의 문법은 무지와 오해의 산물일까 아니면 오히려 정교하게 계산된 포퓰리즘적 반페미니즘의 수사학일까? 아무튼 이들은 ‘젠더’가 이 모든 혼란과 갈등의 원인임을 지적하며 ‘자연스러운’ 이성애 정체성과 ‘보통’ 여성들의 삶을 페미니즘이 돌아가야 할 목표로 제시한다. 여기에서 여성은 한편으로는 자연적 출산과 양육을 위해 존재하는 몸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집합적 정체성과 정책적 배려를 박탈당한 채 시장에서 무한 경쟁하는 몸으로 구성된다. 달리 말해 더 이상 ‘구조적 불평등’은 없으며 페미니즘은 이미 그 목표를 달성했으니 젠더 평등 정책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는 신자유주의적 반페미니즘 혹은 포스트 페미니즘 담론과, 페미니즘은 생물학적 여성들과 남성들의 자연스러운 재생산 본능과 부합하는 ‘양성평등’의 정치학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보수주의적 본질주의는 ‘젠더 반대’를 통해 연결되면서 동전의 양면처럼 오늘날의 백래시 문법을 구성하고 있다. 어느 쪽이든 젠더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여성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벗어버려야 할 문제적 이데올로기이자 부자연스럽고 거추장스러운 사회문화적 개입으로 간주된다. 어쩌면 아이러닉하게도 이들의 반페미니즘 문법은 젠더 없는 세상에서 그들의 본래의 자연스러운 ‘몸’으로 되돌아간 ‘보통’의 여성들은 안전하고 행복할 삶을 누릴 것이라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우리는 아마도 이쯤에서 ‘젠더’가 갖는 다층위적 의미 및 용례들과 그것들이 섹스 혹은 섹슈얼리티와 맺는 복잡다단한 관계들을 설명하는 다양한 페미니스트, 퀴어, 트랜스 정치학의 이론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가장 친숙하게 아는 젠더는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성적 차이, 그러니까 제도적, 문화적으로 부여되고 학습되고 내면화되고 ‘자연스럽게’ 느껴지거나 실천되는 성적 정체성, 기질, 특징, 표현 등을 지칭하며 여기에서 젠더는 생물학적 사실 혹은 물질로서의 섹스 혹은 (섹스화된) 몸과 구별되고 분리된다.

다른 한편 젠더는 이러한 차이들을 불평등하고 위계적인 관계들로 구성하고 배치하는 구조적 원리 혹은 힘, 혹은 구조화하는 과정이나 방식으로 이해될 수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조앤 스콧이 지적하듯 젠더는 이러한 젠더화의 원리와 양식을 볼 수 있는 비판적 렌즈이기도 하다. 우리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라는 시몬느 드 보봐르의 급진적 통찰, 몸이 자연-물질-개인과 문화-의미-구조 사이에서 일어나는 뫼비우스 띠와 같은 운동성(의 장소)임을 짚어내는 엘리자베스 그로츠의 대안적 독해, 그리고 몸과 언어 사이의 담론적 상호구성으로부터 수행적 전복의 가능성과 운동성을 포착하는 주디스 버틀러의 해방적 제안 등은 모두 우리가 젠더라 부르는 구성적 힘, 과정, 양식에 내포된 다방향적이고 생성적인 동시에 불완결적인 ‘되기’와 저항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덧붙이자면 이러한 ‘되기’와 저항의 실천들은 젠더화된 세계를 살아가는 보통의 몸들이 모두, 그러나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살아내는 과정들이다. 젠더는 우리의 삶을 구조화하는 힘이자 억압의 기제인 동시에 우리가 살아내는 매일 매일의 현실이자 때로는 정체성의 터전이며, 때로는 의지적으로 때로는 우연적으로 우리는 젠더 규범을 수행하는 데 실패하면서 젠더를 허물어뜨리거나 다시 쓰기도 한다.

젠더는 우리가 살아내는 삶의 조건이자 풍경이며 또한 살아가면서 만들어가는 장면들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젠더 없는 세상에 대한 상상과 정치학은 자연화된 몸으로서의 귀환이나 사회적인 관계들의 휘발과 더불어 일어나는 경쟁하는 몸들로의 진화가 아닌, 살만한 삶들의 조건과 가능성에 대한 탐색과 실천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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