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서 붉은 실은 흔히 인연을 이어주는 끈으로 묘사된다. 언젠가 만날 사람들은 끈으로 연결돼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북유럽의 작은 나라 덴마크에도 ‘붉은 실’이 있었다. 수도 코펜하겐에서 차로 40분 거리인 근교 마을 로스킬레(Roskilde)에는 ‘덴 뢰데 트로(Den Røde Tråd)’라는 공동주택이 있다. 이곳은 로스킬레 시 안에서도 음악 마을로 소문난 뮤직콘(Musicon)에 위치해 있다. 덴 뢰데 트로는 덴마크어로 ‘붉은 실’이라는 뜻이다. 음악에 친숙한 지역답게 동명의 덴마크 노래에서 따온 이름이다. 덴 뢰데 트로는 덴마크 사회주택협동조합(KAB)의 손길이 닿은 또 다른 프로젝트로, 세대 통합 주택이다.

 

덴마크 로스킬레에 위치한 세대 통합 주택 덴 뢰데 트로. <strong>김수현 기자
덴마크 로스킬레에 위치한 세대 통합 주택 덴 뢰데 트로. 김수현 기자

 

실로 엮인 세대들

덴 뢰데 트로는 코하우징(Co-housing) 주거 형태다. 코하우징은 개별 가족이 독립된 주거 공간을 가지는 동시에 공동생활 공간을 따로 두고 공유하는 주거 단지다. 건물의 구조도 독특하다. 각 세대는 수직적으로 배치돼 있다. 맨 위층에는 노인들이, 가운데 층에는 가족들이, 아래층에는 젊은 세대가 산다. 상부에 거주하는 노인들은 가족 주택과 전체 지구를 볼 수 있다. 활동적인 젊은 세대를 위해 청소년 주택은 외부와 가장 가까운 아래층에 배치했다. 마치 여러 세대를 하나의 붉은 실로 엮은 듯하다.

수직적으로 이어져 단절돼 있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각 세대의 발코니와 층별로 있는 공용 테라스에서 주민들은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층에 있는 공용 공간은 모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덴 뢰데 트로를 담당하는 KAB 직원 울라(Ulla Smitt Vanges·여)씨는 “이런 공용 시설(common facility)은 유럽(주거)의 일부분"이라며 “언제든지 이웃들과 함께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덴 뢰데 트로 1층에 있는 공용 공간. 부엌과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는 대형 탁자가 있다. <strong>김수현 기자
덴 뢰데 트로 1층에 있는 공용 공간. 부엌과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는 대형 탁자가 있다. 김수현 기자

실제로 공용 공간에는 부엌과 여러 명이 앉을 수 있는 대형 탁자가 있었다. 부엌 옆의 책장은 입주자들이 가져다 놓은 각종 영화 DVD나 보드게임으로 빼곡했다. 거주자들은 종종 이곳에 모여 함께 시간을 보낸다. 덴 뢰데 트로 설립 초반부터 함께했던 그리테(Gyrithe Hvass·64·여)씨는 “여기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기도 했다”고 말했다. 공용 공간 한쪽에는 나무 블록으로 만든 크리스마스트리와 아이들의 장난감이 놓여 있었다. 이외에도 주차장, 자전거 수리소, 노인 전용 공간 등 덴 뢰데 트로 곳곳에 입주자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시설이 있었다.

 

각종 영화 DVD나 보드게임으로 빼곡한 책장. 옆에는 입주자들이 나무 블록으로 만든 크리스마스 트리. <strong>김수현 기자
각종 영화 DVD나 보드게임으로 빼곡한 책장. 옆에는 입주자들이 나무 블록으로 만든 크리스마스 트리. 김수현 기자

 

함께 살아간다는 건

덴 뢰데 트로의 거주자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이곳에 살게 됐다. 몰리(Mollie Sainsburg·51·여)씨는 로스킬레에서 50km 정도 떨어진 칼룬보르(Kalundborg)에서 왔다. 그는 “이혼하고 새로운 도시로 이주하고 싶었다"고 이유를 밝혔다. 다른 마을에서 왔기에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는 집을 찾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뮤직콘 지역을 거닐다 우연히 발견한 덴 뢰데 트로는 딱 알맞은 곳이었다. 몰리 씨는 “난 운이 좋았다”며 입주 전에 기존 거주자들과 미팅했던 순간을 회상했다.

청년 입주자인 아스비욘(Asbjørn Kure Kass·28·남)씨는 “저렴한 가격에 거주할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이곳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로스킬레 지자체를 통해서 입주했다. 덴 뢰데 트로의 청년 거주자 15명 중 5명은 로스킬레 지자체에서 할당하기 때문이다. 아스비욘씨는 지금 집이 “살기에 충분히 좋다"며 만족을 표했다. 가족이나 노인 주택과 달리 청년 주택은 한 가구에 세 명이 같이 사는 형태다. 거실과 화장실, 부엌 등은 공용 공간으로 함께 사용한다. 아스비욘씨는 “남과 함께 사는 것은 낯설지만 장점이 많다"며 “근 몇 년간 사람들과 교류가 많지 않았는데 이곳에 살면서 다시 사교적(social)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울라씨 또한 “같이 사는 것은 고립되거나 외로운 기분을 느끼지 않게 해준다"고 말했다.

 

자택에서 다른 입주자들과 티타임을 즐기고 있는 레이몬드씨(맨 앞 줄 왼쪽). <strong>김수현 기자
자택에서 다른 입주자들과 티타임을 즐기고 있는 레이몬드씨(맨 앞 줄 왼쪽). 김수현 기자

같은 시각, 건물의 맨 위층에서는 레이몬드(Raymond McCaffrey·79·남)씨가 다른 노인 거주자들과 오후 티타임을 갖고 있었다. 그는 1년 전까지만 해도 아내와 정원이 있는 큰 집에서 살았다. 그러나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더 이상 그 집에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혼자 살기에는 집이 너무 크고 외로웠어요. 이곳은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어서 좋아요." 매주 금요일마다 열리는 노인 정기 모임 ‘해피 아워(happy hour)’나 비정기적 자체 모임은 그를 외롭지 않게 만들어 준다. 레이몬드씨는 “다양한 나이의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에서) 함께 살고 있고, 우리는 다 같이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덴 뢰데 트로의 노인들이 모임을 가지는 공용 공간. <strong>김수현 기자
덴 뢰데 트로의 노인들이 모임을 가지는 공용 공간. 김수현 기자

인터뷰 도중 아스비욘씨와 레이몬드씨는 함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레이몬드씨는 “특히 아스비욘과 같이 젊은 사람들과 사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삶의 원천이자 정신(spirit of life)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젊은이들의 활동적인 에너지가 노인들에게도 전해진다는 의미다. 반대로 청년들도 노인들과 시간을 보내며 힘을 얻는다. 아스비욘씨는 “그들(노인)은 매우 활동적이고 이는 공동생활에 큰 부분"이라며 자신은 “이곳의 노인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노인, 가족들과 사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 (그들과) 함께 했던 이벤트들도 좋았다"고 덧붙였다. 다른 세대가 함께 살면서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다. 이는 덴 뢰데 트로의 고유한 장점이다. 몰리씨도 이에 공감했다.

우리는 이웃의 아이를 대신 봐주기도 하고, 뜨개질하는 법을 알려주기도 해요. 특히 밥을 지을 줄 모르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어른들이 밥 짓는 법도 알려주죠.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고 보완해 주는 거예요.

 

서로를 이해하며

덴 뢰데 트로는 단순 주택뿐만 아니라 여러 세대에 걸친 커뮤니티로서 기능한다. 모든 거주자는 이곳에 입주하면 구성원으로서 사회적인 책임도 동시에 지게 된다. 플레밍(Flemming Hvass·65·남)씨는 덴 뢰데 트로의 이사회에 속해 있다. 이사회는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인 모임을 가진다. 정기 모임 이외에도 1년에 적어도 한 번은 전체 거주자 모임을 갖고, 거주자들이 원한다면 작은 단위로 더 자주 모인다. 덴 뢰데 트로에 거주하는 노인들은 실제로 달에 여러 번 만난다. 모임에서는 식사를 하기도 하고, 다양한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눈다.

입주민들의 소통을 위해 덴 뢰데 트로 차원에서 페이스북(Facebook) 페이지도 운영하고 있다. 거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몰리씨는 “(페이스북에는) 난방이나 주차 같은 기본적인 문제가 생겼을 때 글을 올리기도 하고, 맥주를 같이 마시거나 보드게임 모임(Bingo night)을 가지고 싶을 때도 이용한다"고 말했다. 거주자들 사이의 소통 창구인 것이다. 비슷한 취미를 가진 거주자들의 모임도 있다. 트레이닝을 좋아하는 몰리씨는 ‘러닝 클럽'을 만들기도 했다. “보드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보드게임 그룹도 있어요. 우리는 다 각기 다른 그룹들을 가지고 있죠.”

 

몰리씨, 그리테씨, 플레밍씨(왼쪽부터)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strong>김수현 기자
몰리씨, 그리테씨, 플레밍씨(왼쪽부터)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수현 기자

타인과 함께 사는 것이 항상 아름다울 수만은 없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 때문에 갈등도 당연히 발생한다. 쓰레기나 주차 문제들이 그 예다. 흡연 문제로 불편을 겪은 적도 있다. 덴 뢰데 트로는 금연 주택인데 자꾸 주변에서 담배 냄새가 났던 것이다. 플레밍씨의 아내인 그리테씨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은 좋지만 가끔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고, 이를 대면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입주자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들은 자체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사안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눌 수 있다. 몰리씨는 “문제가 생기더라도 우리는 싸우지 않고 대화로 해결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그리테씨는 “그렇게 나도 남을 이해하고 상대방도 나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고 덧붙였다. 서로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이들을 같이 살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리테씨와 몰리씨는 “이곳에 사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추천하고 싶다”고 말했다. 다양한 세대가 함께 사는 건 한국에서 흔치 않은 풍경이지만 이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다르다 생각했던 사람들이 함께 사는 건 오히려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 가끔 부딪칠 때도 있지만 각자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붉은 실로 연결된 사람들은 어느새 서로의 친구이자 인연이 됐다.

 

이 아파트는 정말 사랑스러워요(lovely).

남은 삶을 모두 여기서 보내고 싶어요.(레이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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