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도착한 지 일주일쯤 되었던 날, 설레는 마음을 안고 학교 근처에 있는 펍(Pub)에 처음으로 술을 마시러 나갔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에 분홍색, 파란색 등의 색조명이 벽에 쏘아져 있는 펍에서는 술이 마른 퀴퀴한 냄새가 났다. 설렘 반 긴장 반의 마음으로 기숙사 플랫 메이트 에밀리(Emily)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있는데 에밀리의 친구가 다가와서 말했다. “나 어제 스파이크 당했어(I got spiked yesterday).”

처음 들어본 단어에 어리둥절했다. ‘뭔가에 찔렸다는 뜻인가’ 하며 혼자 뜻을 유추해 보기도 했다. 알고 보니 ‘스파이크(spike)’는 당사자 모르게 음료에 몰래 술이나 약물을 타는 범죄행위를 지칭하는 단어였다. 피해자는 의식을 잃거나 몸을 가누기 힘들게 되고 약을 먹은 이후의 기억이 끊기게 된다.

찾아보니 이런 스파이크 범죄는 최근 영국의 큰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었다. 영국 신문 가디언지(The Guardian)의 1월 기사에 따르면 “15%의 여성과 7%의 남성이 이러한 스파이크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한다. 2배 정도 차이나는 지표가 말해주듯 많은 경우 여성들이 이 범죄의 타겟이 된다. 대부분 성범죄의 목적으로 저지르며 ‘데이트 성폭행 약물(Date Rape Drug)’이라고 불리는 진정제 및 수면제 성분의 약물이 주로 사용된다. 이외에도 갈취 또는 단순한 장난을 목적으로 벌이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가해자가 잡히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영국 디지털 신문 인디펜던트(The Indenpendent)에 따르면 “2017년부터 2021년 초반까지 경찰에 보고된 스파이크 사건 중 2%도 안 되는 사건들만이 실질적인 기소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는 스파이크를 당한 사실을 증명하기가 어렵고 가해자 특정이 힘들기 때문이다. 검사를 하려고 갔을 때는 이미 약 성분이 몸에서 빠져나가 있는 경우가 많고, 검출된다 해도 해당 약물을 자신이 직접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또 사람이 밀집해있는 클럽에서 주로 범행이 일어나기에 누가 약을 넣었는지 범인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이렇다 보니 피해를 당해도 잘 신고하지 않는다고 한다. 스파이크 범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 역시 신고율을 떨어뜨린다. 에밀리는 “술을 먹고 벌어지는 일이기에 피해자의 부주의를 탓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피해자에게 책임이 전가되고, 가해자가 처벌망에서 빠져나가는 상황. 많이 익숙한 이야기다. 어쩌면 영국에서는 조금 더 선진적인 인식 및 대응이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 같다. 실제로 세계경제포럼(WEF)의 2021년 성 격차 지수 순위를 보면 한국이 102위를 기록한 것에 비해 영국은 23위다. 여성 인권이 한국에 비해 훨씬 잘 보장돼있는 나라임에도 이런 범죄에 있어 여성의 안전은 여전히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씁쓸했다.

 

2021년 10월 영국 맨체스터에서 일어난 시위 장면. 참가자들은 스파이크 범죄 해결과 안전한 사회 조성을촉구했다. 사진은 영국 가디언지가 관련 내용을 보도한 온라인 화면 캡처. <strong>출처=가디언 홈페이지
2021년 10월 영국 맨체스터에서 일어난 시위 장면. 참가자들은 스파이크 범죄 해결과 안전한 사회 조성을촉구했다. 사진은 영국 가디언지가 관련 내용을 보도한 온라인 화면 캡처. 출처=가디언 홈페이지

 스파이크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키운 것은 여성들의 연대였다. 범죄가 음료에 약을 타는 수준을 넘어 몰래 주사기로 약물을 주입하는 ‘니들 스파이킹(needle spiking)’ 방식으로 더 위험해지고 악랄해지자 여성들은 클럽 보이콧과 시위를 기획했다. 그 결과 작년 10월 영국 각지에 있는 약 40개 대학에서 스파이크 범죄 해결을 촉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의 중심지였던 맨체스터에는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행진했고 몇천 명 단위의 사람들이 각 지역에서 클럽 보이콧에 참여했다.

이후 24세 여성인 한나 톰슨(Hannah Thomson)이 영국 국회 홈페이지에 “클럽을 입장할 때 의무적인 가방 검사를 해야 한다”는 청원을 올렸다. 이에 16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동참하며 해당 문제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다. 일부 클럽은 사회 분위기를 의식해 자발적으로 가방 검사를 진행하고 음료에 뚜껑을 제공하는 조치를 취했다. 언론도 피해자들을 인터뷰하며 문제를 보도하는 관심을 보였다.

그럼에도 아직 갈 길은 멀다. 이러한 노력에도 스파이크 범죄 건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국가적인 차원의 범죄 예방 및 가해자 처벌 방안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연대를 통해 영국 사회에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이건 소수자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은 계속해서 생긴다. 억울하지만 가만히 있으면 문제에 익숙해지고 무뎌지기만 할 뿐이다. 영국의 상황을 보고 다시금 느낀 바는 결국 목소리를 내고 연대하는 것이 사회를 바꾸는 첫 번째 발걸음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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