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름을 기억해.”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중 등장하는 대사다. 여기서 이름은 정체성을 의미하며, 이 대사는 곧 ‘네 자신이 누구인지 잊지 말라’는 뜻을 함축한다. 독일 헤센 주에 위치한 작은 대학 도시 마르부르크에서 일 년간 유학 생활을 시작한 나는, 스스로에게 ‘나를 잊지 말자’는 일종의 임무를 부여했다.

 

오리엔테이션 셋째 날 진행된 파티. 간단하게 술을 마시며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strong>제공=민경민씨
오리엔테이션 셋째 날 진행된 파티. 간단하게 술을 마시며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제공=민경민씨

 2월의 마지막 날 이곳에 도착했고, 길었던 오리엔테이션 기간도 끝이 났다. 일주일 동안 오전에는 비대면 프로그램에 참여해 학교에 대한 각종 정보를 전달 받았고, 저녁에는 펍(Pub)에서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며 새로운 이들을 만나는 행사가 진행됐다. 오리엔테이션 주간이 끝나면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무런 연고 없이 완전히 새로운 곳에 정착하기까지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랜 시간과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교환학생이 아닌 방문학생의 신분인 나는 기숙사를 배정받지 못했고, ‘WG-Gesucht’라는 독일의 집 구하기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방을 얻었다. 두 명의 플랫 메이트와 함께 사는 곳이라 주방용품 등 기본적인 것들은 갖춰져 있었지만, 내가 지내게 될 방은 단 하나의 가구도 없는 말 그대로 완전히 빈방이었다. 때문에 직접 가구를 주문하고 조립해야 했고, 우리나라의 ‘당근마켓’과 유사한 중고거래 사이트 ‘eBay Kleinanzeigen’과 ‘이케아(IKEA)’ 홈페이지를 시도 때도 없이 살피곤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매일같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국제 학생들을 위한 만남의 장이 열렸다. 클라이밍, 배드민턴, 볼링 등 운동모임부터 펍이나 기숙사에서의 파티까지. 새로운 경험을 하고 좋은 인연을 만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기회가 제공된다. 즉 내가 내일 어디에 가게 될지, 누구를 만나게 될지 모르고, 당장 오늘 저녁에 무엇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불확실함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새로운 이들과 만나고 대화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확연히 줄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서 이야기한 만남의 장에서는 대부분의 대화가 ‘스몰 토크(Small Talk)’로 이뤄진다. 이름과 국적, 전공, 어디에 사는지 등을 짧게 이야기하고 또 다른 무리에 가서 비슷한 대화를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마음 맞는 친구를 찾으면 개인적인 만남을 이어가기도 하지만, 서로를 잊은 채 다음 날 다른 곳에서 만나 다시 자기소개를 하는 경우도 빈번히 있다.

‘낯선 곳에서의 생존’이라는 명분하에 그저 살아지는 대로 지낸 지 열흘을 넘기니, 문득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환경에 매몰된 채 스몰 토크 주제 이상의 생각은 잘 하지 않고, 내가 이 곳에 오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되새겨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몇 카페와 식당을 제외하고는 모두 문을 열지 않는 고요한 일요일, 오랜만에 노트를 꺼내 일기를 끄적였다. 앞으로 일 년간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떤 삶의 방식을 찾아 나가고 싶은지에 대해 조용히 고민해 봤다. 잘못하면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한 해를 흘려보낼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길 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내가 갈 방향을 정확히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장 오늘 저녁 무엇을 할지, 누구를 만날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내가 누구인지 잊지 않고 내 템포를 잃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이다.

아직은 설렘보다 두려움의 감정이 크고, 사소한 일들이 작지 않은 스트레스로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마음이 흔들릴 때, 질문에 대한 해답은 나에게서 나올 것임을 안다. 일 년 뒤에는 3월의 첫 목표를 잊지 않은 채 내가 원하는 모습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진 사람이 돼 있으면 한다.

나와 같이 이제 막 교환 생활을 시작했거나, 유학을 계획하고 있는 독자 분들께도 낯선 곳의 불확실함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잊지 말자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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