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가기 전 친구들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오징어게임 꼭 보고, 방탄소년단 노래를 많이 숙지하고 가.” 한국 드라마와 케이팝(K-POP)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다는 뉴스에 장난 반 진담 반으로 한 말이었다. 한국 드라마와 케이팝의 팬은 아닌 터라 조언을 성실히 따르지는 못했지만, 예의상 방탄소년단의 멤버 이름은 외운 후 영국으로 떠났다.

교환학생으로 온 곳은 프레스턴(Preston)이라는 영국 북부의 작은 도시다. 시내는 20분 정도면 모두 돌아볼 수 있고 학생들이 놀러 나가는 곳은 대부분 펍과 클럽 몇 군데 정도인 곳이기에 한국 문화를 마주칠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웬걸, 온 지 한 달쯤 지났을 때 길에서 거대한 오징어게임 벽화를 마주쳤다. 유명한 인터넷 밈처럼, 보자마자 이 말이 나왔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영국 프레스턴(Preston) 도시의 한 건물에 그려진 ‘오징어게임’ 벽화. 건물 내 펍에서 관리하는 벽으로 주기적으로 한 번씩 그림을 바꾼다고 한다. <strong>제공=김해인 선임기자
영국 프레스턴(Preston) 도시의 한 건물에 그려진 ‘오징어게임’ 벽화. 건물 내 펍에서 관리하는 벽으로 주기적으로 한 번씩 그림을 바꾼다고 한다. 제공=김해인 선임기자

 벽화가 그려진 곳은 한국 관련 가게도 아닌 평범한 영국 펍이었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벽을 관리하는 스태프가 오징어게임의 큰 팬이라서 선택한 것 같다”며 “멈춰서 사진을 찍고 가는 사람도 많다”고 말해주었다.

케이팝의 인기도 실감한다. 대학에 있는 한국 관련 동아리가 펍에서 여는 주간 행사에 처음으로 간 날, 나보다 케이팝을 더 잘 아는 영국 친구들의 모습에 놀랐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친구에게 “이 노래 뭐야?”라는 말만 열 번 넘게 물었던 나와 달리 옆에 있는 영국 친구들은 가사까지 따라 부르고 있었다.

물론 행사 특성상 케이팝을 좋아하거나 한국어 전공 친구들이 많이 모인 자리이긴 했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케이팝에 대한 인지도가 매우 커진 것은 사실이다. 한국어를 전공하는 영국 친구 마리아마(Mariama)는 “5년 전만 해도 나만 케이팝을 들었다면 이제는 주변 많은 친구가 듣는다”고 했다. 그는 “영국은 미국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며 “BTS(방탄소년단)와 블랙핑크가 미국 무대에 서며 화제가 된 무렵부터 영국에서도 유명세가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처음에는 한국 노래를 아는 영국 친구들의 모습이 반가웠다. “무슨 한국 노래를 좋아하냐”, “BTS에서 제일 좋아하는 멤버는 누구냐”는 질문을 하며 쉽게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워낙 케이팝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터라 점차 소재가 고갈되는 일이 빈번했고, 한국이 케이팝과 드라마로만 대표되는 상황에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한국인인 나뿐만이 아니었다. 한국어와 일본어를 공부하는 조(Jo)는 “영국의 젊은 세대들은 한국을 케이팝과 케이드라마(K-Drama)를 통해서만 접하는 것 같다”며 “역사와 정치 등 한국의 현실적인 부분은 무시하고 한국 여성이나 한국 남성을 이상화해 이들과의 연애만을 꿈꾸는 어린 학생들이 많다”고 했다. 실제로 한국어를 전공으로 삼은 학생들 일부는 케이팝을 통해 한국에 관심을 가졌다가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흥미를 잃고 전공을 바꾼다고 한다.

한국의 문화가 세계에 알려지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내가 자라온 문화에 관심을 보이면 쉽게 대화를 시작할 수 있고 낯선 타국 문화에만 나를 맞추려 하지 않아도 돼 마음이 편안해진다. 하지만 좀 더 다양한 모습의 한국이 알려지면 좋겠다는 욕심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영국판으로 번역‧출간된 책 ‘82년생 김지영’을 동네 서점에서 마주쳤을 때 무척 반가웠다. 외국인 친구가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소감이 어떤지, 다른 나라에서는 이 책 속의 상황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등을 물어보며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케이팝과 한국 드라마의 문화적 힘과 전파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세계 곳곳에 있는 한국인들이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 설명할 필요가 없어진 것은 BTS와 오징어게임의 덕이 클 것으로 생각한다. 한식 같은 음식문화도 케이팝과 드라마의 인기를 힘입어 유명해지고 있음을 생각하면 시간이 해결해줄 수도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법칙은 잘 팔리는 상품을 더욱 홍보하는 것이다. 진정한 문화 다양성의 세계는 노력하지 않으면 만들어지지 않는다. 언제까지나 방탄소년단의 ‘최애’ 멤버만을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더 다채로운 한국 문화를 알리는 일에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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