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교 학생과 고(故) 이어령 명예 교수 <strong>제공=홍보실
본교 학생과 고(故) 이어령 명예 교수 제공=홍보실
이어령 명예교수 (1934-2022)

1934년 충남 아산 출생. 서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단국대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6년 ‘우상의 파괴’로 평단에 데뷔, <서울신문>, <한국일보>와 <중앙일보>, <경향신문> 등 언론사에서 논설위원을 거쳤다. 본교 문리대 교수로 1966년 부임했다. 30년간 본교에 몸담으며 국어국문학과 석좌교수, 명예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내며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국립국어원 설립을 이끌었다. 또 88서울올림픽 계폐회식 총괄기획위원,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이 교수는 대한민국예술원상(2003), 자랑스러운 이화인상(2011), 제11회 홍진기 창조인상 특별상(2020)을 수상했다. 또 작년엔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주요 저서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1960), ‘이것이 한국이다’(1986), ‘디지로그’(2006), ‘생명이 자본이다’(2013) 등이 있다.

 

 ‘시대의 지성’ 이어령은 교육자였다. 수많은 직함 사이 선생에게 마지막까지 붙은 꼬리표가 ‘이화여대 명예교수’다. 교육자 이어령에게 대학은 지성의 밀실이었다. “열린 사고를 모색하는 공간인 동시에 폐쇄적인 공간이기도 하지.” 김민희(국문·99년졸) 톱클래스 편집장과의 이날 인터뷰 주제는 대학이었다. 100시간가량의 인터뷰를 엮어 김 편집장은 ‘이어령, 80년 생각’(2021)을 출간했다. 문학 평론가, 논설위원으로 이미 이어령 자체가 브랜드였지만, 정작 그가 원하는 길은 따로 있었다. 

“사실 나는 글을 쓰는 것보다, 언론인으로서 유명해지는 것보다, 대학 강의실 안에서 지적 교류를 하는 대학교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어요.” 

초대 문화부 장관을 퇴임한 직후에도 그는 대학을 원했다. “대학에서 받아준다면 기호학 강의를 하고 싶군요.” 1991년 12월20일자 <중앙일보> 인터뷰에서도 이렇게 밝혔다. 문학 평론가, 언론인, 관료, 시인 등 다양한 범주의 직함이 붙는 그였지만, 교육은 무엇보다도 가장 원했던 일이었다. 

바라던 대로 그는 40년간 교수 생활을 했다. 그중 30년을 본교에서 교수로 지냈다. 문화부 장관을 퇴임하고 1995년부턴 석좌교수로 7년간 본교 강단에 다시 섰다. 2011년 그는 명예교수가 됐다. 

이어령 명예교수가 본교와 처음 인연을 맺은 건 1966년이다. 고(故) 김옥길 본교 제8대 총장이 학내 개편을 이끌던 시기였다. 개편의 일부로 교수 임용 방식을 파격적으로 바꿨다.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거물급 인물들이 이화로 왔다. 그중 한 명이 이어령이었다.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국악인 황병기와 함께였다. 그의 나이 만 32세였다. 

그전까지 이어령 선생은 문학 평론가이자 언론인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1956년, 평론 ‘우상의 파괴’로 기성 문단을 통렬히 비판했다. 그길로 문단계 스타가 됐다. 

 “당시 언론인이자 문학평론가로 지성 사회에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던 분이셨죠. 이어령 교수 임용으로 이화의 위상도 올라갔습니다.” 이어령 선생의 본교 재직 당시 출판부에 근무했던 이종선 전 기획처 홍보차장이 설명했다. 

고(故) 이어령 교수 <strong>제공=톱클래스
고(故) 이어령 교수 제공=톱클래스

본교 부임 후 그는 인문대 국어국문학과(당시 문리대 한국어문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부임 초기 <현대수사학>, <창작>, <현대문학강독>, <문예사조사> 등의 전공수업을 맡았다. 1995년 국어국문학과 석좌교수로 돌아와서는 강의 범주가 문학을 넘어섰다. <한국문화의 뉴패러다임>, <한국인과 정보사회> <문학과 기호학>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강단에서 그는 쉴 틈 없는 학문적 모험을 이끄는 선장이었다. 선생의 마지막 제자 김민희 편집장이 그의 강의를 회상했다. 김 편집장은 그의 강의가 ‘광활한 지적 여정’이었다고 표현했다. 

“당시의 강의록을 단 한 장도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있어요. 오랜만에 꺼내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죠. 이육사의 시 ‘청포도’와 ‘황혼’에서 시작한 강연은 호메로스의 ‘율리시즈’와 ‘오딧세이’로 이어져요.” 선생은 둘을 비교하며 한국인의 공간개념은 ‘응축’, 서양인의 공간개념은 ‘확산’이라는 1차 결론을 내리고, 이를 토대로 ‘정보매체로 본 확산과 응축’으로 논의를 확장한다. 끝에선 캐나다 경제학자 해롤 이니스(Harold Innis)의 이론을 설명한다. 통신기술이 사회조직 개혁의 주동적 역할을 한다는 내용으로 강의는 막을 내린다. 

“분야를 막론하고, 동서고금의 지혜의 바다를 오가는 지적 여정이 숨 가쁘면서도 짜릿했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다른 세상에 여행을 다녀온 듯 멍했던 기억이 나요.” 

이 교수의 강의에는 별도의 교재도 없다. 대신 날마다 강의록 한 장이 주어진다. 김 편집장은 그 강의록을 ‘요술 종이’에 비유했다. 이어령 명예교수의 두뇌 속에 있는 강의록이 그대로 압축돼 있었기 때문이다. 강의록을 들고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는 학관 전체에 쩌렁쩌렁 울리기 일쑤였다. 강의는 늘 수업 시간을 넘겨서도 이어졌다. 

그는 그야말로 ‘선생’이었다. 몇 수를 앞섰다.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사안을 바라보는 그만의 시선과 통찰력에 놀라곤 했다. 김 편집장은 수업에서 그가 몇 년 후 유비쿼터스 혁명으로 재택근무가 일상화될 것이라 말했던 일을 떠올렸다. “‘한국인과 정보사회’ 시간이었어요. 강의가 끝나고 친구들과 ‘저게 말이 돼?’하며 고개를 갸웃거렸죠. 공상과학영화의 한 장면이 그렇게 빨리 현실화될 거라니, 믿어지지 않았거든요.” 김 편집장은 결국 그의 예측이 정확했다고 말했다. 

학문 연구에 있어서도 시대를 앞서나갔다. 이어령 선생의 1호 박사 제자, 김현자 명예교수(국어국문학과)는 그를 ‘최첨단 안테나’로 비유했다. “누구보다 앞서가는 방법론으로 작품 자체가 지닌 내재적 질서를 탐구하셨죠. 문학 연구에 과학을 도입하는 등 획기적인 방법론을 시도했어요. 동서고금을 막론한 최첨단 안테나 같은 분이셨어요.”

 

 

그의 수업은 하나같이 쉽지 않았다. 학부, 석사, 박사 과정까지 이어령 명예교수의 모든 강의를 수강한 정끝별 교수(국어국문학과)가 전했다. “강의 내용, 시험, 성적 모두 빽빽했고 어려웠죠. 내용이 새롭고 창의적이었기 때문에 열심히 해도 성적이 잘 안 나오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정 교수는 이어령 선생의 <수사학>, <현대 소설의 이해>, <문학연구방법론>을 수강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네르발, 말라르메, 존 던이라는 이름을 (수업에서) 처음 들었죠. 바슐라르, 하이쿠, 소쉬르, 야콥슨 등 선생님 강의는 당시로선 외계어를 듣는 것처럼 새롭고 낯설었어요.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도장깨기처럼 선생님의 수업은 늘 지적 자극과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켰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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