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문학회가 주최한 '듣고 싶은 강의' 순례 행사에서 '문학과 상징 연구'를 주제로 강연 중인 이어령 교수 <strong>제공=이화역사관
이화문학회가 주최한 '듣고 싶은 강의' 순례 행사에서 '문학과 상징 연구'를 주제로 강연 중인 이어령 교수 제공=이화역사관

그의 강의실은 항상 수강생으로 가득 찼다. 이어령 교수의 강의는 수강 신청을 하면 가장 먼저 마감되는 강의 중 하나였다. 정 교수는 그의 수업이 1980년대 본교의 3대 명강의로 통했다고 전했다. ‘2002년 이화동창문인집’에서도 본교생들이 그의 강의에 보인 열성적인 반응을 찾아볼 수 있다. 우계숙 작가(국문·71년졸)의 글에 이어령 교수의 수업과 관련한 일화가 나온다. 

“우리 중 그 누구도 그분의 강의를 빼먹는 사람은 없었다. 우린 그분이 발췌해 인용하는 책들을 열성적으로 찾아 읽었다. 나 역시 부리나케 찾아 읽었는데 도서관엘 가 보면 그 책은 이미 우리 과 급우가 벌써 대출해 가곤 했다.” 

선생의 강의가 인기 강의로 통한 건 유명세나 영향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교수로 재직하는 와중에도 언론사 논설위원, 책 저술, 고문 활동 등을 이어갔지만 강의는 늘 철저하게 준비했다. “수업은 항상 최고 인기였습니다. 인지도 때문이 아니라 강의의 질이 매우 높았죠. 외부 일정이 아무리 많아도 수업 준비는 매우 철저했고 늘 수업 5분 전에 도착하셨죠.” 김 편집장이 설명했다. 

그가 수업 강단에 선 마지막 날이었다. 2001년 9월7일 오후3시, 본교 국제교육관 대회의실에 400여 명의 ‘제자’가 몰렸다. 스승의 마지막 메시지를 모두가 고대했다. 이 강연에서 선생은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을 분석했다. “처음 입시 시험 감독을 맡았을 때 학생들이 ‘진달래꽃’에 대한 시험 문제를 풀면서 의심없이 정답에 동그라미 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시의 의미까지도 단순화해 사지선다형으로 풀어가는 한국 교육 풍토에 선생은 분노했다. 그것과 싸우는 게 대학, 그리고 이어령 강의의 존재 이유였다. 

“시의 세계에서는 흑과 백이 조화를 이루는 ‘그레이 존(gray zone)’이야말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고 삶을 깊게 하는 이상향입니다. 제 지난 30여 년은 흑백 논리로 황무지가 된 대학가의 문과 교실을 ‘그레이 존’으로 만들기 위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수업에서까지 그는 오직 이어령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했다. 

2001년 이어령 석좌교수 고별강연 <strong>제공=이화역사관
2001년 이어령 석좌교수 고별강연 제공=이화역사관

고별강연을 끝으로 선생은 이화의 강단을 떠났다. 그는 이화 밖에서도 분야를 넘나들며 목소리를 냈다. 언제나 그의 목소리엔 ‘창조’가 묻어있었다. 이어령의 교육철학은 또 다른 석학을 낳았다. 2006년 서울대에서 본교 석좌교수로 자리를 옮긴 최재천 교수(에코과학부)는 이렇게 설명한다. “학문 간 경계를 낮춰야 한다며 통섭을 말하는 사람으로서 이어령 선생은 롤모델이죠.” 인문학자 이어령과 과학자 최재천이 만난 접점이었다. 

최 교수가 본교로 온 지 2년쯤 되던 어느 날이었다. 학내 행사에서 이어령 선생은 최 교수를 처음 만났다. 이 선생이 다가와 최 교수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화에 와서 반갑습니다.” 최 교수는 자신의 석좌교수 임용이 이어령 선생의 빈 자리를 메우라는 특명이라고 느꼈다. 4~5년 전부터 두 석학의 만남이 잦아졌다. 2019년 2월 출범한 ‘조선일보 100년 포럼’을 함께했다. 대담에서 이 선생은 ‘생명자본’을 미래의 핵심 키워드로 강조했다. 

“이어령 선생은 에드워드 윌슨 하버드 석좌교수가 제시한 키워드인 ‘바이오필리아(Biophilia)’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이후에 모임에서도 종종 뵀죠.” 최 교수는 윌슨 교수의 제자다. 

그가 기억하는 이어령은 창의 그 자체였다. “저는 이어령 선생의 다른 이름이 ‘이창의’라고 봐요. 우리 시대에 이분처럼 창의적인 분은 없었죠.” 

그의 창의 정신은 이화의 자부심이자 원동력이었다. “모두가 선생의 은퇴를 섭섭해하길래 석좌교수로 다시 모셨지. 석좌교수가 되고 기뻐하셨던 게 기억에 남네.” 1995년 그를 석좌교수로 임용한 건 장상 제11대 총장이다. 장 전 총장이 재임할 때 선생은 창조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선생도 이화를 각별히 생각했다. 김 교수는 선생이 잠시 본교를 떠나 문화부 장관으로 있던 시절 일화를 전했다. “선생님께서 어느 날 차를 타고 이화 대학 옆을 지나가는데 당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이화 대학을 진심으로 아끼셨죠.”

이어령에게 이화는 안마당이었다. 정 교수는 이어령의 팬덤이 있었다고 회상한다. “이화에는 선생님의 팬덤이 굳건했죠. 학교 본부, 동료 교수들, 제자들이 이루는 팬덤의 트라이앵글 속에서 지지와 지원, 존경과 찬사를 한 몸에 받으셨다고 생각해요.” 

이화의 요청엔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새 건물 이름을 지어주세요, 이번 행사에 참석해 주세요’ 말씀드리면 이화가 부탁하는 건 거절 못한다며 다 들어주셨어요.” 장명수 이화학당 이사장은 한국일보 기자 시절부터 선생과의 인연을 이어왔다. 1963년부터 그는 한국일보 기자로 일했고, 1999년부터 3년간 한국일보 사장을 지냈다. “신문기자로 일하면서 선생이 이런 저런 부탁을 들어주는 분이 아니란 걸 알아요. 선생의 무조건적 이화 사랑에 놀랐습니다.”

 

이화학당 한옥교사 봉헌식에서 연설 중인 고((故) 이어령 명예 교수 제공=이화역사관
이화학당 한옥교사 봉헌식에서 연설 중인 고((故) 이어령 명예 교수 제공=이화역사관

 

이화의 울타리 안에서 이어령은 따뜻했다. 또 다정했다. “회의에서 뵀을 때엔 따뜻하고, 부드러웠어요. 냉철하고 천재적인 지성인의 모습에 비해서 개인적 인품은 굉장히 따뜻했다는 거죠.” 이 전 부처장은 그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그렸다. 

병마가 찾아온 후에도 선생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주로 혼자서 말씀하시지만 그렇다고 듣는 자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세밀하게 저의 눈빛과 표정, 탄성과 반문, 의문을 체크하십니다. ‘제가 얼마나 아는가’, ‘제가 얼마나 모르는가’, ‘제가 얼마나 호기심을 표하는가’에 따라 텍스트의 드라이브와 브레이크가 조정되곤 했죠.” ‘김지수의 인터스텔라’를 연재한 조선비즈 김지수 기자(사회·94년졸)는 이렇게 당시를 전했다. 선생의 눈빛과 태도는 물론, 그 안의 텍스트도 하나의 ◆스펙터클이었다. 이어령 선생의 ‘다이얼로그 공연’은 김 기자가 저술한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2021)에 담겼다.

 그의 광활한 지적 여정에도 마침표가 찍혔다. 2월26일, 편안한 얼굴로 ‘이화여대 명예교수’ 이어령은 영면했다. 향년 89세. 문화체육관광부 장(葬)으로 치러진 장례에 본교 김은미 총장이 장례위원으로 참여했다. 2월28일 본교 2021학년도 전기 학위 수여식사에서 김 총장은 그를 추모했다.

“돌아가시면서도 죽음에 대한 사유를 계속하시며 ‘죽음은, 엄마가 열심히 밖에서 놀고 있는 아이에게 “그만 집에 와서 밥 먹어라” 하는 것’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선생님을 추모하고 하나님 곁에서의 영면을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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